걷다가 멈추면 3

29. 엇갈린 신호

by 이단단

​봄이 온다는데 숲은 여전히 겨울의 민낯을 하고 있다. 잎사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다 떨궈낸 나무들은 앙상한 뼈대만으로 하늘에 어지러운 빗금을 긋는다. 군더더기 없는 저 날카로운 가지들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의 복잡한 문장들도 저렇게 투명하게 마를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서늘해진다.


​길 위에는 한 사람이 걷고 있다. 나를 등지고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는 어떤 표정도, 어떤 목소리도 담겨 있지 않다. 그저 묵묵히 자기만의 소실점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진실을 읽곤 한다. 붙잡을 수 없는 거리감, 혹은 혼자여야만 완성되는 고독 같은 것들.
​길가에 놓인 빈 벤치들은 누군가 남기고 간 온기를 잊은 지 오래다. 덩그러니 서 있는 가로등만이 이 무채색의 풍경 속에 유일한 수직의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텅 빈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부서진 계절의 파편들을 줍는다.


​떠나는 뒷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단호하다.
나 역시 저 뒷모습처럼,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정직해질 수 있을까.
​겨울의 끝자락, 숲은 말이 없고 나는 그 침묵을 문장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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