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없는 일상

by 희재

[졸리면 자고, 방에 비쳐 드는 볕을 쐬고, 책을 읽고, 평소 하고 싶던 걸 잔뜩 했다. 하지만 서글펐다. 정작 커피는 못 마시고 냉장고에 가득한 귤도 까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 [쓴 커피]에 '커피 없는 날들'이라는 주제의 글이 있다. 첫 문장에서 나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읽었다. 커피를 비롯해 모든 음식을 건강식으로 먹고 있는데 확실히 한 끼 덜 먹고 체중을 줄일 때보다 몸이 건강하게 가벼워지는 걸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 건 아니지만 말이다. 커피를 마시지 못할수록 커피가 간절해졌고 결국 커피 이야기로 가득한 책 [쓴 커피]를 오랜만에 펼쳤다.


[면접 볼 회사 앞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주변의 카페를 살핀 것이었다. 아직 회사에 붙지도, 심지어 면접도 보기 전에 말이다.]


10대, 20대, 30대를 보낸 광화문을 떠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커피'다. 광화문에서 서촌과 북촌을 가는 것도 쉽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퇴근하고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찾아다니는 카페 투어도 가능하다. 매일유업 본사가 광화문에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백화점에서만 봤던 폴바셋은 광화문 일대에만 5곳이 있다. 테라로사, 펠트커피 매장은 2곳 이상이라 가까운 매장을 방문하면 되고 맛있는 커피가 베이글에 가려진 포비 역시 따뜻한 카푸치노에 플레인 베이글을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진다.


[마음이 허름해지는 날이면 사치를 부린다. 오늘의 사치는 한파특보가 내려진 날에 차가운 커피 마시기, 택시 타고 작업실 가기.]


종종 사람들에게 내비치지 못하는 마음이 얹힐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혼자 울렁거리는 생각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카페를 찾는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은 달콤한 크림을 얹은 아인슈페너를 주문하거나, 늘 주문하기 전 구경만 했던 조각 케이크 한 조각을 추가하거나, 아니면 숙면을 포기하고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는 거로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고는 한다. 무료 음료 쿠폰으로 비싼 음료를 주문하는 사치 대신 아는 맛이라서 좋아하는 것을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위로를 담은 보상은 오히려 편안하게 만든다. 마음까지 한 겨울 같았던 겨울날 동굴이 되어준 서촌의 한 카페에서 추가 주문한 스콘, 다락방 같은 2층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일에 몰입하게 되는 빈브라더스에서 추가 주문하는 커피, 미술관 마당이 보이는 자리에서 얼그레이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에 진한 카푸치노를 곁들이면 그 순간 아무것도 부러운 게 없는 테라로사에서의 시간처럼 말이다.


[나는 메뉴에 정성스레 적힌 설명을 읽고 고르는 걸 좋아한다. 같은 원산지의 원두를 블렌딩해도 카페마다 늘어놓는 묘사는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 드물었던 자체적으로 로스팅을 하는 카페들이 늘어나면서 원두의 맛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다. 자신들이 구현하려고 했던 맛을 함께 느낄 수 있게 원산지, 배합 비율, 해당 원두에서 어떤 맛을 느낄 수 있는지 설명해 놓은 원두 노트는 마치 가이드북 같다. 그중 인상적인 원두는 아메리카노로 마시면 구운 곡물, 옥수수차, 숭늉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빈브라더스의 '몰트'이다. 첫맛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고소한 향이 나는데 끝맛에 느껴지는 '구수함'은 원두 노트를 그대로 구현해 낸 것 같은 맛에 다시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원두 노트를 다시 보게 만든다. 마치 설명대로 맛을 느낀 건 아닌지 스스로 의아하게 되지만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보면 이 원두 누가 배합하고 로스팅을 했는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폴바셋 '아이스 크림슨 펀치 과일차'


커피가 없는 일상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달콤한 히비스커스 티 같은 폴바셋의 아이스 크림슨 펀치 과일차를 마시며 쓰기 시작한 글을 처음 아메리카노를 맛본 20살 이후 처음으로 연하게 주문한 빈브라더스의 아이스 롱블랙을 마시며 마친다. 커피가 그리워서 쓴 글인데 글을 쓰면 쓸수록 커피가 더 생각난다. 위로가 필요할 때, 집중해서 일을 해야 할 때, 나 자신과 좋은 것을 나눌 때, 좋아하는 게 더 좋아지는 건 어쩌면 커피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쓴 커피] 전체 내용에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이 문장으로 마지막을 대신해 본다.


[그러고 보니 커피는 대단하다. 매일, 많이 마셔도 질리지 않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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