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의 이름표를 떼면서 넘어진 수민을 뒤로하고 걸어가다가 걱정되는 지원은 다시 수민을 찾으러 가는데, 뒤에서 이름표를 뗴며 얄밉게 말하는 수민]
"지원이 아웃! 돌아올 줄 알았지"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한 장면이다.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온 강지원이 자신의 친구와 남편의 불륜을 복수하는 장면이 매 회차마다 새롭게 나온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이 바뀌기 어려운 것처럼 독하게 마음먹으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친구 지원이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지원이가 가진 것은 곧 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뒤틀린 수민의 인성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지금 내가 너무 한 건 아닌가?'라는 내적 갈등을 겪는 지원을 향해 조력자 유지혁은 이렇게 말을 한다.
"매트 위에 올라갔을 때는요. 상대의 상처도, 내 상처도 확인하면 안 돼요. 두 가지만 생각해요. 나는 싸우기로 했다. 나는 이길 것이다."
이 장면은 내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짧지 않은 삶의 시간에서 나는 강지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결정뿐만 아니라 타인의 결정까지 책임지려고 했다. 누군가를 온전히 미워하기가 힘들었고, 동료들보다 앞서 나갈 때면 혼자 튀는 건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고 생각하지만 거절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나의 기획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서 보고한 그 사람을 그 개 XX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독하게 마음을 먹을 때마다 너무 지나친 건가 싶어서 내가 더 노력하면, 내가 더 잘하면 상황은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를 갈았다.
22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잠자는 시간보다 깨어있는 시간이 더 많다. 피로가 극에 달하는 게 느껴지면서 미뤄둔 휴가를 신청했고 짧은 겨울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 기간에 새로운 경험을 해보자고 했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필요한 건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충전이라는 걸 알게 됐다.
평소 퇴근하고 공부를, 글쓰기 모임 과제를 하러 방문해서 서로 얼굴이 익을 대로 익은 카페가 아닌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모르는 공간에서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른 커피를 주문하고 '나'를 찾는 시간으로 보냈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쓰고 싶은 글, 어느 날은 카페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문득 '어쭙잖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전에서는 '어쭙잖다'의 뜻을 '아주 서투르고 어설프다 또는 아주 시시하고 보잘것없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쩌면 나의 책임감, 배려, 독하게 마음을 먹는 것, 동료들보다 앞서 나가는 모든 것을 '어쭙잖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힘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하고,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하고, 나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면 즐겁게 앞으로 달려 나가면 되고, 나의 선택과 결정에만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을 '어쭙잖게' 타인을 의식해서 나의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던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스 신화 중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지내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과거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과거를 놓지 못했던 건 아닐까? 희미한 빛의 초점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며 고생한 것을 잊고 '내가 너무 ~하지 않았나?'라는 미련에 뒤돌아봐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서 빛을 향해 고난의 행군을 반복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단 한 번의 기회만 있던 오르페우스와 달리 나의 마음과 결정을 믿고 목적한 지상의 빛을 향해 걷는다면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강지원이 친구의 자리에서 온갖 악행을 하는 한수민을 향해 제대로 복수를 하려면, 오르페우스가 아내 에우리디케와 다시 지상에서 함께 살려면 잊어서는 안 된다.
"매트 위에 올라갔을 때는요. 상대의 상처도, 내 상처도 확인하면 안 돼요. 두 가지만 생각해요. 나는 싸우기로 했다. 나는 이길 것이다."
나 역시 잊지 않을 것이다. 어쭙잖게 참고 배려해서 얼마나 오래 가슴앓이를 했는지, 홀로 앞서 나가는 게 불안해서 머뭇거리다가 흐지부지된 것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한 게 마음의 이끼가 되어 내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말이다.
봄이 다가오면 하늘하늘한 봄옷을 입기 위해 체중 감량에 관심이 높아진다. 그런데 24년 봄은 체중뿐만 아니라 마음의 무게도 감량해보려고 한다. 가벼운 마음은 가벼운 몸을 만들고, 가벼운 몸은 가벼운 발걸음이 되고, 가벼운 발걸음은 어디든 갈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믿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