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힘들 때가 종종 있다. 대체로 글에서 묘사하는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감정이입을 하다 보면 슬픔과 좌절을 거쳐 분노로까지 이어지는 선명한 감정선이 끊임없이 요동치기에 그러하다. 한 문장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날 괴롭게 했던 책 중 하나는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던 소년 이스마엘의 회고록,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야 그동안 ‘소년병’이라는 문제의 본질(아동 인권 유린 등)을 일반적인 개념적 표지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심각성을 인지한 게 아니었을까 하고 돌아보게 됐다. 그가 경험한 끔찍한 상황들의 각 장면마다 나를 세워보며 소년병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이곳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자칫 추상적인 개념들의 총체로만 이해될 수 있는 다른 누군가의 문제가 사유와 공감의 과정을 거치며 구체화되어 같은 인간의 문제로 다가왔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 경험의 한계를 넘어 겪지 않은 일도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유는 인간 모두가 한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 위해 인간이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범죄에 가담한 자, 아이히만이 모두가 예상했던 ‘비정상적인’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정상적’ ‘인간’ 임에 주목했다. 이어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악의 결정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무능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의 법이기도 한 총통의 명령에 복종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증언과 진술을 종합해보았을 때 그 명령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유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그의 주장과 그가 거대한 나치라는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저지른 일들에 대한 그의 책임을 경감시킬 수 없다.
법적 책임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 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것만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유의 무능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일조한 끔찍한 결과가 ‘악행’ 임을 죽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했다.
한나는 사유의 무능이 말하기의 무능을 낳았고 나아가 행동의 무능을 낳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뿐이 아니다. 사유의 무능이 악으로 이어지는 데는 공감의 무능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공감능력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능력임에도 공동체 생활을 하며 마비되기도 쉬운 능력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비되지 않도록 각자의 공감능력을 발달시키고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바로 사유에서 시작한다. 아이히만은 사유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도, 그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의 조건을 무시하며 유대인의 인간성뿐 아니라 스스로의 인간성도 짓밟았다.
예외적인 인간만이 악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 모두 악의 발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사유의 무능으로 평범한 인간도 한순간에 쉽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또 사회적 존재로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그 사회에서 합의한 도덕과 법(상관의 명령 등)을 지키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란 쉽다. 하지만 다수(혹은 전체)의 선이 언제나 진정한 선이 아닐 수 있음은 인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증명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것처럼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다수(혹은 전체)’의 선이 아닌 인간과 인류 공동체를 위한 ‘진정한’ 선을 찾아 더불어 살기 위해 인간으로서 사유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