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
자연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다른 동식물에 비해 약한 존재이다. 적으로부터 눈에 띄지 않기 위한 보호색도 없을뿐더러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발톱과 이빨도 없다. 심지어 추위와 더위에 약해 나체의 몸으로 자연에서 생활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신체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지구의 생명체로 생존해왔다. 인간이 단순히 생존을 떠나 지금의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인간의 이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인류사회를 이롭게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성을 동물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타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 중 휘늠 나라 여행기에서 이성을 이롭게 사용하는 휘늠과 해악을 증진시키는 데에 악용하는 인간을 비교함으로써 이성을 갖고 있음에도 타락한 당시의 인간들을 풍자했다.
이성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하는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지는 않듯이 이성이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절대적 진리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성은 단지 인간이 완전성을 추구하고 진리를 찾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이라고 본다. 휘늠들은 이성이 완전하기 때문에 이성을 따르고 그에 바탕을 둔 판단이라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긴다. 걸리버는 휘늠들의 다른 여러 가지 면모들을 종합하여 그들에게 존경심을 표했겠지만 나는 휘늠들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봉 역시 무오류를 가정한 독단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섭다고 생각했다.
걸리버는 이성적인 휘늠들의 세계에선 의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그들에게 거짓되거나 불확실한 명제에 대해 논쟁, 말싸움, 토론하거나 주장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해악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분으로써 존재한다. 절대적 이성이라는 이데아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그 무언가는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을 통하여 완전한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성이 진리를 찾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찾은 진리 역시 그 자체로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진리가 완전해지기 위해선 이성적 판단에 의해 생겨난 의견이 필요하고 그 의견이 반대 의견을 포함한 다양한 의견들과도 부딪혀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이 진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반쪽 자리 진리에 불과하며 자유로운 토론을 통하여 진리를 완성시켜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 다른 사람들의 선호 등 다양한 사회적 생활의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들이 내린 이성적 판단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휘늠들처럼 자신들의 이성적 판단의 무오류성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판단들이 다양한 이성적 존재들의 다양한 의견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각 의견들을 경청하여 옳은 것은 수용하고 틀린 것은 그 틀린 이유를 깨닫고, 의견 주장자를 설득해가는 토론의 과정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휘늠들처럼 불확실한 명제에 대해 토론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해악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불확실한 인간 사회의 문제들을 사회적 논의 과정 없이 그 문제를 해결할 권위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맡기는 것을 아무렇게 여기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성이라는 수단을 완전성을 추구하는 데 올바르게 사용하여 인류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선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지 않고 끊임없는 이성적 논의를 통해 인간 사회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을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