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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Jul 12. 2019

The great “Self dignity”

니콜 크라우스 <그레이트하우스>


니콜 크라우스 <그레이트하우스>, 2011, 민음사


숨은 조각 찾기를 하듯 설렜다. 책상의 행방과 기원을 쫓으며, 오랜만에 나의 내면 깊숙한 서랍들도 열리고 들썩였으며 덜컹거렸다.
정작 모든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책상은 말이 없다. 책상을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의 흔적도 없다. 중압감에 압도될 뿐이다. 여기서 상실을 복원하려 하고, 상처에 발버둥치며, 상념을 자아내고, 고독과 맞서는 것은 한 때 책상 곁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 소설은 그 책상과 대면한 사람들을, 또한 그들에게 스며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백하듯 풀어낸다. 이와 동시에 관계의 어긋남, 크레바스 틈처럼 드러나는 인간의 허약함, 입히고 입는 상처들, 개인의 삶 속에 침범한 역사적인 폭력들과 상실에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모든 면을 표면으로 불러낸다.
 


왜 그들일까?


 의도적으로 공통점을 추출해내려는 시도 역시 일종의 폭력이지만, 나는 책상을 잠시나마 점유했던 이들이 ‘왜 그들일까’ 임에 주목했다. 중년의 소설가, 판사, 소설가 아내, 피아노 치는 레아의 사회성을 거부한, ‘홀로’가 주종이 된 삶과 좁은 방에 지옥의 문을 터놓은 듯 거대한 형체를 위시하는 책상은 명백한 교집합을 가진다. 나는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는 듯한 기묘한 모양새와 낯선 배열을 가진 책상의 이질감과 중압감을 네명의 인물들에게서도 똑같이 느꼈다. 읽는 내내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그들 자아의 무게에 짓눌리고 시달려야 했다.
인물들의 무게를 덜어내기 힘들었던 건 그만큼 소설에 얼큰하게 빠져있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외부 세계의 바깥바람을 차단해내는 대신 내면의 서랍 속에 어떤 재능을 지니고 있어, 유한성을 인식하고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인물들이었다. 자신을 더 가볍게, 버리는 것에, 놓아버리는 것에 특출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들을 순탄하게 놔두지 않는다. 이들의 신비로운 재능과 동시에 어긋나고 비뚤어진 삶, 상실과 상처의 점철, 자기혐오와 의심이 나란히 평행선을 긋게 했다. 그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원래 자신의 몫이 아닌 상처들을 감내하게 된 부조리로 그들은 점점 내면의 속삭임, 죽음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다. 고독의 짐을 지닌 그들이, 그리하여 더욱 비범한 네 인물의 숙명과 재능이 아름다웠고 아팠다.



기억이 지켜져야만 하는 이유


 나는 소설의 원제를 이렇게 해석했다. 소설의 구심점이 되는 ‘유대인’의 자아존재감은 그야말로 감히 형체를 가늠하기조차 버거운 ‘거대한 집(great house)으로 다가왔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혹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유대인의 숱한 죽음을 목도했다. 잃어버린 사람과 터전은 되돌릴 수 없다. 상실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실물을 찾고자 하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결국 ‘완벽한 기억’의 체현만이 존재의 근원이 된다. 상실 이전의 세계를 물질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와이즈씨의 노력은 그래서 필사적이다.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국적, 가족 상실을 치유할 대체제로 기억의 복원물들을 집요하게 찾아다니는 유대인들의 존재감이 끔찍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매일을 죽음과 대면했기에 역설적으로 삶에 더 충실했다. 신체적 학살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내면의 자아는 무럭무럭 불타고 있었듯이.
 


그들 곁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


 소설 <그레이트하우스>에는 내면으로 침잠하는 주인공들 곁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S, 도빅의 아버지, 소설가 아내의 남편, 요아브의 여자친구)가 혼재한다. 심지어 몇몇은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 누구의 편에 서서 읽어볼지는 독자의 선택이다. 이들은 상대의 상처와 내면을 깊숙이 어루만지려 하지만, 삶은 그리 넉넉하게 미소 짓지 않는다. 함께 있는 시간과 앎의 정도는 비례하지 않는다. 매일 달을 볼 수 있지만, 달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우리 타인의 한계이자 슬픔이다. 그러나 작가는 2부 수영 구멍 챕터 중 남편의 상실을 빌려 말한다. 상대를 모두 아는 것이 사랑을 이룩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내의 수영구멍을 유지해주는 것도, 그 구멍에 들어가는 데 늘 실패하는 것도 사랑을 유지하는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 상대를 모두 아는 것은 가능한 방법도, 최상의 방법도 아니다.
 


 좋은 소설이란 빛과 같다.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듯,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며 집요하게 떠있는 시추선과 같이 깊숙한 곳까지 비춘다. 그런 의미에서 니콜 크라우스는 좋은 소설가다. 실러의 표현을 빌려 ‘잠재적인 것의 절대적 표현’을 해낼 수 있는 작가다. 교과서처럼 무질서하며, 4지선다형 외 답들이(동시에 언제든 변형될 수 있는) 난무한 삶의 정체를 탁월하게 인지하고 있는 작가다. 소설의 4가지 내러티브에서 오색빛깔의 인물들의 내면을 비춰, 다방면의 원액을 추출해내는 것 같아 환상적이었다. 그 원액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내재했다. 무언가 근본적이고 위대한 것, 감히 쉬이 정체를 그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 그것은 집으로 비유했던, 인간의 자존감이다. 나는 감히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그레이트하우스>의 원액을 ‘살아 있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위대함’이라고 말하겠다.
 


인간의 정신이 견딜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겠지. <그레이트하우스>中


 *제겐 다 감당이 안될 만큼 좋은 소설이었는데 현재 절판으로 확인됩니다. 다시 출판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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