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묵묵히 걸어온, 나만의 여정

by 어벤준


나는 큰 굴곡 없이, 무탈하게 자라났다.

어린 시절은 비교적 풍족했고, 따뜻하고 평온했다.


부모님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동네에서 규모있는 교육사업을 함께 운영하셨다.

성실하고 바른 일상이었고,

나 역시 그런 어른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IMF’라는 이름의 거센 폭풍이

우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휘몰아쳤다.


사업은 무너졌고, 고등학생이던 나는 형과 함께

창문 하나 없는 1평짜리 고시원에 몸을 누여야 했다.


그 방엔 침대 하나와,

침대만큼의 옆 공간이 전부였다.

그 옆 공간에는 가방 하나 놓기도 빠듯했고,

서로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릴 만큼 가까웠다.


눅눅한 공기, 희미한 형광등, 낮고 낡은 천장.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배웠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았다.

흔들리는 삶 한가운데서도, 나는 나아갔다.


대학에 들어갔고,

등록금과 생활비는 스스로 감당했다.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힘들지만은 않았다.

도전할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았고,

그게 오히려 나를 움직이게 했다.


밤이면 심야 카페로 향했고,

새벽녘이 가까워질 무렵,

커피 향을 뒤로하고 조용히 돌아왔다.


낮에는 수업을 들었다.

몸은 늘 무거웠고, 눈꺼풀은 자주 내려앉았다.


그래도 하루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매일을 견디고, 묵묵히 해내는 근성 같은 것.

그건 아버지에게서 배운 태도였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시면서도,

새벽마다 우리 집에서 운영하던 학원 강의실을 직접 청소하고 출근하셨다.

남들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아무 말 없이, 익숙한 손길로 바닥을 닦으시던 그 뒷모습.


어릴 적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모습이 곧 삶의 태도였다.


어릴 적에는 그저 낯설었던 풍경이,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비로소 이해됐다.


그건 단지 부지런함이 아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었고,
그냥 그렇게, 아버지다운 사랑이었다.


그 모든 날들이 지나고, 나는 어느새 졸업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특출 나진 않았지만, 어디서든 잘해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세상은 넓었고, 내 앞의 시간은 끝도 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처음 사회에 나가 맡은 일은, 이름 있는 대기업의 인사팀이었다.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만의 질서를 찾아가려 애썼다.

조율하고 정리하며, 일의 흐름 속에 나를 조금씩 녹여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보다 숫자를 다루는 일이 더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엑셀에 머리를 기댄 채 수치를 정리하는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했고,

숫자가 딱 맞아떨어질 때의 명확함은 작은 위안처럼 느껴졌다.


기회가 날 때마다 관련 업무에 손을 뻗었고,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갔다.


몇 번의 도전 끝에, 나는 재무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숫자의 흐름을 읽고,

그 안에 담긴 맥락을 하나씩 정리해가는 일.


하루에도 수많은 숫자가 오갔고,

그 속에서 나는 일의 흐름과 조직의 리듬을 조금씩 익혀갔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조금씩 손에 익어가는 그 감각이

나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보다 숫자가 더 정직한 세계.

때론 차갑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따뜻하게 닿았다.

숫자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첫 월급을 받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참았던 음식들을 마음껏 사 먹고,

항공사 프로모션을 찾아 저렴한 해외여행도 다녔다.


소비는 즐거웠지만 언제나 계산적이었다.

비싼 것보다는 ‘이 정도면 괜찮지’ 싶은 것들을 골랐다.

나는 그렇게, 버티며 살아남는 법을 배워갔다.


첫 연봉은 3천만 원 남짓.
그 시절엔 나름 괜찮은 수준이었고,
적지 않은 금액을 저축하려 애썼다.


아껴야 했지만, 숨 막히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팍팍한 삶이 나를 말라가게 두고 싶지 않았기에,

작은 사치 하나쯤은 스스로에게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돈을 모아갔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고,


통장의 숫자는 천만 원, 이천만 원, 삼천만 원을 넘어

어느 날, 나는 조용히 1억이라는 숫자 앞에 서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통장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단순한 돈이 아닌,

나의 인내, 그리고 버텨낸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 돈이 쌓이던 순간들마다,
나는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작가의 이전글1장. 나는 왜 이토록 돈에 집착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