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을 읽고
“시는 편지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러나’를 기준으로 시상이 전환되고, 쉼표의 반복으로 운율을 형성하고 있으며...” 나에게 있어 모든 시는 정답이었어야 했다. 책에 적힌 몇 줄의 글을 그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마치 시인보다 시를 잘 안다는 듯이, 내가 이 시를 모두 통달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교과서에 적혀 있는 주제와 시의 특징을 그대로 읽고 5개의 선지에 쏟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시 감상 방법이었다. 시 하나당 10분 이상의 시간을 쓰지 않았고, 주제와 비유법만 파악하면 바로 다음 시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남들보다 많은 시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으며, 올라가는 점수에 ‘시는 이렇게 쉬운거야.’라며 단언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시의 감상이 아니라 시를 감독하는 것뿐이었다는 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통해 깨달았다. 이 시는 나에게 있어 시를 감상하게 해 준 첫 번째 작품이며, 나의 인생을 투영한 첫 번째 시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처음 접했을 때는 역시나 수업시간이었다. 시험에 어렵게 낸다는 말에 수업에 집중해야 했고, 한눈에 봐도 압도되는 길이에 이건 또 언제 공부하냐는 걱정이 앞섰다. 시인의 이야기나 화자의 삶은 뒷전이었다. 나에게는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것보다 당장 내 앞에 놓여있는 시험 문제 몇 개가 중요했다. 역시나 이날도 수많은 정보가 내 눈과 귀를 맴돌았다. 화자의 슬픔과 외로움을 선생님이 말하는 몇 자로 정리했고, 화자가 자신의 삶을 극복하는 그 극적인 순간을 시상의 전환, 정확히 다섯 글자 안에 가뒀다. 그리고 얼마 뒤 시험을 치렀으며, 그렇게 시와의 첫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이 시가 다시 떠올랐던 순간은 입시에 실패했을 때, 그러니까 재수할 때였다. 인생 첫 가장 차디찬 실패를 맛본 나는 가장 유명하다던 재수 학원에 등록했다. 80명의 학생이 한 교실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닭장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그런 학원이었다. 그 넓은 학원과 교실에서 온전한 내 공간은 1평도 되지 않는 작은 책상과 의자의 공간뿐이었다. 그마저도 온전하게 보장되지는 못했다. 한 달, 많으면 2주마다 자리를 바꿨으며, 나의 공간과 익숙해질 때쯤 또 다른 0.5평짜리 공간이 내 임시 거처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학원 근처 학사에서 내 생활을 시작했으며, 학사 는 2, 3평 남짓 되는 공간에 책상과 침대, 화장실이 테트리스마냥 끼워 맞춰진 곳이었다. 아침 일찍 학사에서 나가 학원에 출근하고, 늦은 저녁이 되면 다시 학사에 출근하는, 쉼이 없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학사에 들어오면 나의 늦은 것 같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뒤로 한 채 잠을 청해야 했다.
학사 침대에 누워있었던 여느 날 중 하루였다. 문득 하늘이 보고 싶어 조그마한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하늘을 보지는 못했다. 창문이 너무 작아 하늘까지는 보여주지 못했으므로. 하늘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 하얀 벽지를 보고 있자니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구절을 마음속으로 읊조리자 갑자기 서글퍼졌다. 나는 지금 갈매나무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수네 집 헌 삿을 깔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시의 ‘나’와 함께 나의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나’가 고개를 들기 전 했던 행동을 따라 하면 나도 고개를 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학원의 강의와 함께 재수하는 친구와의 무의미한 한탄과 걱정을 되새김질했다. 사실, 한탄과 걱정의 내용은 매일 비슷하다. 대학에 붙을 수는 있을지, 대학에 붙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남들보다 조금 늦는 건 아닌지와 같은 그런 것들. 답이 나오지 않는 무수한 고민을 하고 있자면 어느새 시의 ‘나’ 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너는 어떻게 고개를 들 수 있었냐고, 나의 갈매나무는 무엇일지 좀 가르쳐 달라고.’ 항상 그의 답은 똑같았다. 슬픔이 반복되면 무뎌지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삐딱하게 봤던 그 당시 나에게 이 대답은 나의 슬픔과 고민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고, 묘하게 생긴 반항심에 나는 이것들을 모두 지고도 나의 갈매나무를 찾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반항심도 잠시, 속절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에 나는 나의 슬픔을 지고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늘을 보고자 했으나 천장만 바라봤던 그 하루의 생각은 조금 신선했던 경험으로 남겨졌을 뿐, 슬픔을 지고서도 고민이 해결되는 극적인 순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도 기억 속으로 사라져갔다.
입시를 모두 끝내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시를 다시 떠올리는 일은 없었다. 재수의 경험이 있는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그 당시 경험이 나의 마음을 치고 간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어느새 시의 ‘나’처럼 그 당시 어지러움이 나를 치고 가더라도 나는 이제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습한 방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해했다. 슬픔과 한탄이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 것은 나의 고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갈매나무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옆에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재수하던 시절 나의 갈매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재수를 모두 마치고 되돌아봤을 때야 비로소 나의 갈매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우수한 대학을 입학하는 것이 나의 슬픔에서 벗어날 유일한 해결 방안이라 생각했었는데, 대학에 온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입학은 나의 갈매나무가 아니었다. 대학 입학이라는 사실 하나는 나의 슬픔을 앙금으로 만들어 줄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내 옆에 있었던 갈매나무는 그런 도구 하나가 아니었다. 대신 그 당시 생각했던 무수한 고민이 나의 갈매나무였다. 내 순간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서글퍼했던 그 무수한 순간들이 나를 버티게 해 준 유일한 갈매나무였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하던 그 하루는 이 시의 ‘그러나’가 아니었을까. 나는 나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이 나의 고개를 들었던 순간이며, 하늘이 아니라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하얀 천장이 시의 ‘나’의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았다.
모순적이게도 지금 나에게 갈매나무는 재수 때의 생각들이다. 수많은 과제와 시험에 내던져져 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내 0.5평이 좀 더 나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 당시 했던 나의 고민은 모두 찬란했으며, 하늘을 보지 못해 시를 떠올리는 낭만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상황은 불안정했어도 목표와 꿈이 안정적이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지금까지 나의 자산이 되고 있다. 남들보다 늦게 가는 대신 오래 볼 수 있었고, 나를 더 되돌아볼 수 있었으며, 슬픔의 층위를 내리는 것이 포기가 아니라는 가장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만의 갈매나무를 찾았다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나’도 갈매나무를 떠올릴 때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까. 무엇보다 나에게 갈매나무를 찾아준 ‘나’의 갈매나무는 무엇이었을까 물어보지 못한 게 아쉽다. 그러나 이미 내가 ‘나’가 된 지금, ‘나’의 갈매나무도 나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하고 있다. 수많은 고민을 끝마치고 누군가에게 담담히 써 내려가는 그 편지 자체가 그의 갈매나무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 내려갈 만큼 단단해지지는 않았다. 나를 치고 오는 무수한 생각들에 나는 아직 흔들리고, 슬퍼할 때면 다시 그 습한 공간으로 들어가 뜻 없는 글자들을 나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위에 하얀 천장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고 있으며, 내가 고개만 든다면 하얀 천장이 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바란다.
이 시를 읽은 모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편지로 남길 수 있을 만큼 흔들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