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자그마치 569년 뒤 후손들이 그린 역사

by 다이룸맘

조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한때 내가 천재 화가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어릴 적 나의 자부심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싹텄다.


발단은 엄 씨 친족들이 총출동한 영월 여행이었다.

큰 관광버스 두세 대를 가득 채운 후손들이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서린 그곳에 모여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 속 ‘엄흥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내 어린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흥도?


아, 우리 조상님이 그 유명한 화가구나!


역쉬... 그래서..내가....


김홍도랑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엉뚱하고도 용감한 확신이었다.

그 착각은 어린 시절 내 미술 인생에

굉장한 자부심이었다.


연도니 성씨니 하는 복잡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예술가의 피’를 타고난

귀한 자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나는 꽤 당당했고,

어린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한참 뒤에야 화가 김홍도와 충신 엄흥도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노량진에서 시험공부에 매달리던 시절

사육신공원에서 다시 만난 ‘엄흥도’라는 이름은

그제야 판타지를 걷어내고

묵직한 역사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

설 연휴의 마지막 날,

흘려보내기 아쉬운 시간을 붙잡듯

우리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왕과 사는 남자〉.

요즘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단종의 이야기였다.

마침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가 역사를 배우고 있기도 해서, 온 가족이 총출동했다.


아이들을 하나씩 끼고 복도를 사이에 둔 채 남편과 떨어져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던 그때였다.


어린 임금의 운명이

어른들의 선택 속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아이가

나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잃어 가는 장면은

숨을 들이마시기도 조심스러울 만큼 마음을 죄어 왔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사람.

꼬질꼬질하고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촌장 엄흥도,

하지만 그 투박함 속에는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손익을 따지기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숨기지 못하는 정으로 결국 그 자리에 남아

외로운 단종의 곁을 따뜻하게 지켜 주는

마지막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기울었고,

더 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엄흥도.


엄흥도....?


설마…

우리 집 그 엄흥도 어르신?

어릴 적 내 부끄러운 착각의 주인공…?


그때까지도 긴가민가했다.

영월이라는 지명이 나오자 ‘맞나 보다…’ 싶었고,

영화 말미에 그가 훗날 충무공이라는 호를 받았다는 설명이 나오자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스크린 속 또 다른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명회.


평소 남편은 그를 대단한 인물이라 말하곤 한다.

딱히 자랑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도,

그의 비상함을 칭찬하며 후손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뿌듯해 하는 눈치였다.


500여 년 전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한 인물을 두고 대치하던 두 사람.


그 아들의 아들이, 또 아들의 딸이 이어져

지금 한 가족이 되었고,

영화관 복도 양옆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의 가슴 아픈 장면에는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신기해,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남편만 힐끔거리게 되니

감동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 버린 뒤였다.


불이 켜지자마자

나는 복도 건너편 남편에게로 부리나케 향했다.

옆에서 훌쩍이는 딸도 잠시 잊은 채,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빠, 오빠, 오빠! 봤어?

엄흥도… 우리 엄흥도 어르신이야.

나 영월 엄 씨잖아.

헐… 이거 완전 운명 아니야?”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쏟아 내는 말에

남편은 잠시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길,

아직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나와

심드렁하게 맞장구를 쳐 주는 아빠를 보던

첫째가 말했다.


“와, 엄마 아빠 진짜 닮았다.

아빠 성격은 완전 한명회 같고,

엄마는 끝까지 포기 안 하는 게 엄흥도 같아.

아빠는 완전 T고, 엄마는 완전 F잖아.”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나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아… 근데 난 충무공이라길래

당연히 양반 자손인 줄 알았더니…

양반이 아니었네…


감동도 잠시,

첫째가 다시 묻는다.


“엄마, 그럼 엄마는 노비의 자손이야?”


“노비 아니고 평민!

아주 뼈대 있는 평민이거든!

촌장님 이래잖아! 촌. 장. 님!”


남편이 바로 받아친다.


“어딜 봐서 네가 양반이냐.

딱 봐도 상놈 관상이지.”


나는 눈을 흘긴다.


“아유, 이 양반아.

역적의 피를 우리 충신 집안이 중화시켜 줬더니

감사한 줄을 모르시네.”


남편이 웃고,

나는 더 어이없어 웃는다.


둘째와 셋째는

무슨 말인지 반쯤도 이해 못 한 얼굴로

그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치열했던 시대 속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켰고

누군가는 권력의 중심에서 역사를 뒤흔들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맞서야 했던

시간이 흐르고,

그 후손들은 이렇게 한 집 안에서

서로를 놀리며 웃고 있다.


조상님들께는 조금 송구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분들이 지키고 싶었던 미래란

이처럼 시시콜콜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아니었을까.


역사는 멀리 스크린 속에 남아 있고,

삶은 바로 곁에서 투닥거리는 소리로 이어진다.


오늘은 중간중간 무서운 장면이 떠오른다며

혼자서는 못 자겠다고,

엄마와 함께 잘 명분을 확실히 얻은

세 녀석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한명회와 엄흥도,

할아버지의 어디쯤을

묘하게 빼닮은

이 말 많고 탈 많은 세 녀석들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 문득 궁금해진다.


참 재미있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어둠 속에서 찾은 엄마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