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별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줘요
어린 시절 기억속의 나는 대부분 “혼자” 였다. 사촌언니방 책장 가득한 만화책을 읽고 있던 나, 한달된 새끼들을 돌보던 이모네집 강아지 제니를 신기하게 보고있던 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옛 성곽 담벼락의 돌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걷던 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떤 장면으로 기억되고 늘 그 곳엔 나 혼자였다.
주위에 사람들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어린시절 우리가족은 외할머니댁이나 이모네집에서 살다시피 했고, 그래서 늘 외가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외가에선 다같이 모여 밥을 먹었고, 티비를 봤고, 사시사철 산과 들, 바다로 나들이를 다녔다. 나는 집안일도 곧잘 도와드렸고, 일하는 언니가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할 때는 졸졸 쫓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함께 해서 즐거웠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어린 시절 나는 눈치가 없었다. 할머니가 사촌오빠들만 주려고 따로 둔 반찬을 생각없이 먹고 뭘 잘못해서 혼나는지 몰랐다.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게 뭔지 몰라 멍청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게다가 말길도 잘 못알아들었다. 심부름을 시키면 엉뚱한 걸 사왔고, 모두가 다 웃는데 나만 어리둥절하다 한참이 지난 후 뒤늦게 혼자 웃곤 했다. 그래서 사촌언니,오빠들은 - 친언니조차도 나를 놀이에 잘 끼어주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녀야 할 땐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다.
내 기억속의 어른들은 대체로 싸우고 있었다. 어쩌다 등장하는 엄마와 아빠는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었고, 친척 어른들도 즐겁게 보이는 듯 하다가 언성이 높아지고 불편한 기류가 오래도록 흐르곤 했다. 혹시라도 눈치없는 나의 말과 행동으로 어른들 사이를 불편하게 할까봐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나는 어렸고, 그 속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늘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나 혼자 놀았던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세상에서, 나는 관찰자가 되기로 맘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혼자 노는 것이 좋았다. 하늘, 나무, 꽃,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까지… 나를 둘러싼 주위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옥상에 올라가 말리려고 펼쳐놓은 건어물이 얼마나 꾸덕해졌는지 눌러보기도 하고, 멀리까지 쫙 펼쳐져있는 색색의 지붕들을 보면서 그 집엔 무슨 일이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또한 나혼자 역할놀이도 정말 재미있었다. 대체로 만화책에서 봤던 등장인물을 끌어다가 나의 상대역을 시켰다. 어떤 날은 나는 캔디였고, 유리의 성 이사도라였고, 유리가면의 천재배우인 여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초등(당시는 국민)학교 3학년이 되던 겨울방학, 아빠가 경상북도 울진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갔다. 당시 울진은 정말 깡촌이었다. 농번기,농한기 방학이 있었고, 비가 많이 와 개울이 넘쳐 다리가 유실되면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무장공비가 나오던 시절이라 군사시설로 통제되었지만 집에서 20분만 뛰어가면 동해바다가 펼쳐졌고, 집 뒷산 곳곳에는 온갖 놀거리가 가득했다.
그곳에서의 3년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삐그덕거리는 학교교실 마룻바닥과 낡은 책걸상들, 오래된 풍금, 100년도 넘은 큰 나무가 있던 운동장부터 학교를 마치면 뒷산 개울에서 이름모를 물고기와 개구리를 잡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학교옆 작은 구멍가게에 동네마다 있는 미친년 언니가 머리에 꽃을 꽂고 돌아다녔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땐 가늠하기 힘들만큼 놀 거리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고,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와 함께 놀았던 동네 아이들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놀던 시간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밤하늘의 별이었다. 80년대 울진의 밤하늘은 쏟아질 듯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집 베란다에 앉아 하염없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중에서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있었는데, 나는 그 별에게 매일 이야기를 하염없이 쏟아내었다. 그 별은 내가 본대로, 느낀대로 그 어떤 말을 해도 다 들어주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온전히 나만을 바라봐주는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때의 나는 보이는대로 보고, 들리는대로 듣고, 느껴지는대로 느끼며 숨을 쉬었다. 알알이 빛나는 별빛가득한 하늘을 바라봤고, 짠내로 흠뻑 젹셔진 바다에 귀 기울였고, 파도소리를 담고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와 와닿는 걸 느꼈다. 가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꿈을 꾸곤 한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고, 사람들에게 지칠때면 그 시절 아홉살 앨리스가 되어, 나의 별과 함께, 나만의 세상으로 달려가곤 한다. 그 시절의 내가 되어 다시 살고 싶다는 소망이 내 안에 가득 차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