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렛뎀 이론]을 읽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내버려두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래, 네가 그러든 말든.”
속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나는 내버려두기라고 믿었다.
그런데 『렛뎀이론』을 읽고, 책을 읽기 전의 나를 다시 돌아보며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내버려둔 것이 정말 ‘타인의 선택’이었을까.
혹시 그것은 내려놓음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는 아니었을까.
“나는 내버려둘 수 있어.”
그 말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이 질문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지금도 나는 그 안을 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위로나 조언이라기보다
마치 하나의 과정처럼 다가왔다.
통과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갈 수 없는 어떤 단계처럼.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힘이 생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내가 아프지 않은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나일까, 아니면 비행기에 탄 낯선 사람일까?
답은 명확하다.
내 책임이다.
내 건강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의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불편함을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내 요구를 어떻게 해결할지 선택하는 것은
상대의 몫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다.
‘내버려두자’라고 말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고,
‘내가 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통제 가능한 것, 즉 그 상황에 대한 나의 반응에 집중하는 선택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남편의 마음,
아이의 마음,
시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혹시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설명하면
이 관계들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사실 집중해야 할 것은 내 마음이었는데
나는 타인의 마음에 과도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 결과는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내버려두자’라는 말이
차갑거나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정직한 책임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들은 내버려두고’라는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왜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못할까.
그 질문을 붙잡고 생각하다가
하나의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삐진 상태일 수도 있고,
화를 표현하지 않고 눌러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버려두는 것은
상대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긋는 선택이다.
생각의 끝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런데 곧바로 또 하나의 질문이 따라왔다.
그럼, 어떻게 살 건데?
무엇이 싫은지는 분명했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는 시간’을 지나
‘나를 바라보는 시간’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다가오는 시간에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정직하게 묻고 싶다.
그동안 계속 마음속에 떠올랐던
“나답게 살고 싶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녔는지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친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