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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Jul 25. 2022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내 미숙함과 부족함은 다음 얘기로 미뤄두자. 어쨌거나 벌어진 현실이 늘 그렇게 어딘가 한(恨)스럽고 힘겹게 삼켜야 할 아픔만은 가득한 건 아니라 말하고 싶다.

인간 자체가 그리 심각하지 않고 우울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무작정 긍정 회로를 돌리는 버릇이 있는데 이혼으로 인한 변화 역시 그렇게 겪어가고 있다.

당장 다음 달을 어떻게 사나 싶은 걱정을 3년째 하면서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정말 그래서 숨이 꼴깍, 꼴깍 넘어가는데도 어찌 됐건 살아간다.

앓는 소리를 잘하지만, 솔직히 스스로 기특하고 대견할 때가 많으며, 그냥 여봐란듯이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순간이 종종 꽤 많다.

그 오히려 좋은 순간들을, 이게 맞는 말이 맞나 싶은데 굳이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혼의 순기능’쯤이 되는 일들을 이 페이지에서 말하고자 한다.     


물론 삶이 가혹해지지 않았냐 묻는다면 일부분 맞는 말이다. 애 딸린 서른셋 이혼녀에게 보내는 시선은 짐작할 정도로 동정에 서려 있기 마련이고 동시에 서늘하게 한 김 식어 있다. 이미 내게 한 꺼풀의 필터가 쓰이는 일이다.


‘아, 이혼하셨구나.’


대답과 동시에 눈빛이 어딘가 묘하게 뒤틀리거나 멀어지거나 하는  사람도 있고 어머 어떡해, 하며 촉촉해지는 이도 있다.

많지는 않아도 더러 냉랭하기도 한다. 과장이 아니라 싸늘, 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눈을 하게 된 데에는 저마다 각자의 사연과 배경이 있을 거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거고 이미 어쩌지 못할 시선이다.

서러워 울렁대기 전에 이미 방어기제가 완벽히 세팅되어 있어 크게 섭섭하지 않다. 그저 나에게 기대했던 어떤 모습이 있었던 사람이었겠거니 해버린다.

어느 날엔 갑자기 울렁대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고 환상통처럼 가슴이 아프기도 한데 그럴 땐 맛있는 술을 한잔하거나 고기를 사 먹는다.      


쿨하고 멋지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은데 꼭 변명처럼 아이를 위해 이혼을 결정했다는 다음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사실 아이 생각에 한 이혼이라지만 아이에게 분명 미안한 짓임에 틀림이 없는 걸 잘 안다고. 그렇기에 각오하고 있다고.

그 주저리는 돈으로 줄 거 아니면 선 넘는 오지랖을 넣어두라는 경계 거나 혹은 그렇게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은 반만 해도 된다는 끄덕 거림 이기도 한데, 나름의 이 우아한 수비를 꼭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다.     


네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다,라고 시작되는 말 중 진짜로 날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 얼마나 될까.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서 우울한 소리를 늘어놓거나 같이 주저앉힐 심산인지 나도 걱정 안 하는 내 신세 한탄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아가 남자 복이 있네, 없네, 팔자가 드세네, 어쩌네.

애 생각해서라도 재혼을 해야 하지 않냐며 웬 오십 대 아저씨를 식사 자리에 부른 사람도 있었다. 어디서 뭐 돈 많은 아저씨라는데 사람 좋다고.

그렇게 좋은 사람은 본인이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 잠시 의아했는데 지나 보니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무례한 사람은 안 보면 되는 거다. 이렇게 손쉽게 멀리해야 할 사람을 알아채다니.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아이가 유튜브에서 공룡박물관 투어를 보고 와서는 공룡 발자국을 보러 바다를 가고 싶다고 했었다.

무슨 영상을 보고 어딜 가고 싶다고? 어딘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었는데 역시였다.

아이가 잔뜩 기대하며 재생해준 영상은 경남 고성의 공룡박물관이었다. 강원도 고성이면 별 고민 안 하는데 경남 고성이라니. 서울에서 교통편도 편히 없는 저 먼 곳에 공룡 하나 보러 가야 하나. 애매하게 반응하자 내 눈을 살피던 아이는 짧은 어휘력으로 열심히 설득해 댔다.     

거기 엄청 큰 공룡 뼈도 있고 바닷가 바위에 진짜 공룡 발자국도 있다고. 본 적도 없으면서 숨차게 고성 상족암에 가야 할 이유를 꼽는데 그 열정을 꺾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가고 싶다는데. 수중에 가진 건 없지만 열심히 어디 데리고 다닐 마음은 있었다. 백번 유튜브 보는 것보다 한 번 가보고 ‘와 여기 진짜 멀구나. 공룡 뼈 진짜 크구나.’ 본인이 느끼는 건 천지 차이였다.


그렇게 내비게이션으로 경남 고성의 상족암을 검색하고 무려 5시간에 이르는 시간을 보며 고민했던 것도 잠시, 바로 공룡박물관 근처 숙소를 찾고 무턱대고 예약까지 다 해버렸다.

밥과 잠이야 뭐 이 나라 이 땅에서 뭐든 못 먹고 못 눕나. 일단 가면 다 답이 있으니 그 어느 것도 예측하지 못하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


공룡 이름을 줄줄이 읊으며 짜릿해하는 아이의 통통하고 둥근 뺨을 곁눈으로 보며 달리던 고속도로에서 정말로 행복했다.      

어쩌면 이런 거라도 해줄 수 있는 게 다행인 혼자만의 위안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라도, 이런 거라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의 어딘가가 채워지는데.    


결코 즉흥적인 성격은 아닌데 말했다시피 생각을 길게 못 한다. 거기다가 어차피 우리는 달랑 둘만 있는 단출한 구성 아닌가.

인원이 늘어날수록 의사 결정이 어렵기 마련인데 달랑 둘이니 아이와 나만 합의에 이르면 된다.

아이 아빠와 스케줄을 의논하고 경비를 책정하고 피곤하네, 마네. 갈 때 운전은 네가 해라 올 때는 또 얼마나 막히겠냐 등등의 대화를 안 해도 되는 게 너무나 편하다.

사실 이 머나먼 고성행 이전에도 아이와 단둘이 틈만 나면 어딜 쏘다녔다.      


아이가 한참 기차에 꽂혔을 4살에서 7살 사이에는 거의 주말마다 KTX와 SRT를 탔다. 강릉도 가봤고 인천공항 고속철도와 자기 부상 열차를 몇 번씩 왕복으로 탔다. 연고 없는 광명을 가고 대전에 천안을 별일 없이 갔다가 바로 몇 분 뒤 출발하는 서울행 열차를 타려 플랫폼을 내달리기도 했다. 기차에 단단히 꽂힌 아이를 위해서, 오로지 기차라는 수단을 이용하기 위한 시간들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기차에 ‘탔다’라는 행위에 충실했고 어딜 가든 뭐 하지도 먹지도 않고 바로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그 무의미한 짓을 해댔다. 조금 더 커서야 가평역에서 내려 하릴없이 산책 좀 하는 제법 당일치기 여행 냄새나는 시간도 보내게 됐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기억이다. 아이는 지금도 기차를 타고 어딜 갔고 무얼 봤는지, 안 타 본 기차가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눈을 빛낸다. 내가 미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게 많았다.

대전 가는 기차 안에서 심하게 코 골며 자던 맞은편 아저씨를, 춘천 가는 2층 기차 속 터널을, 수원역에서 잃어버리고 온 장난감 등등을 어느 날 뜬금없이 기억 속에서 툭 꺼내 이야기해 줄 때가 있다.


수많은 기차표의 의미가 아이의 머리와 마음 안에 다 있었다. 이미 그걸로도 충분히 족한 경험인 게 틀림없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을 때도 아이와 뭘 많이 하고 돌아다니긴 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애초에 마음가짐이 다르다.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닌데 사람 마음이 참 웃기다. 누군 속 편하게 침대 위에 뻗어 있는데 나만 아이를 돌보고 뭘 해줘야 하는 거, 그거 억울하고 열불 나는 일이다.

본인 아이인데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 말할 수도 있는데 닥쳐보면 그렇지 않다. 나도 쉬고 싶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굴뚝같은데 양해도 없이 모든 걸 떠안게 되는 그 막막함은 불만이 되기 쉽다.

보상을 바라고 결혼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보상심리가 아니다. 나는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며 몬테소리도 아니다. 애 하나 어쩌지 못하는 쌩초보 애 엄마였고 결혼 생활의 지혜라고는 없이 남의 집 아들과 살게 된 남의 집 딸이었다.


너도 아빠가 처음이고 나도 엄마가 처음인데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들지 않겠냐. 좀 봐줘라 식의 논리는 날 한순간 모성애가 부족한 엄마, 남편 위해줄 줄 모르는 이기적인 아내로 만들었다.

주말마다 갈등이었고 속 터지기 일보 직전의 찐만두 같은 심정으로 살았다. 그러다 이혼을 목전에 두고 갈등이 치달을 때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평일에도 너와 나 둘이었는데 주말에도 우리 둘 뿐이구나. 그렇다면 어디 한번 재밌게 놀아볼까? 그렇게 포기하게 되니 차라리 편했다.

진짜 무서운 말 아닌가. 포기가 편하다니.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포기 상태는 발전이 없다. 나아짐도 없다. 정체되어 고이는 것은 언젠가 썩기 마련이니 말이다.  정체되어 썩어가는 물속에서는 슬며시 이혼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포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자라고, 그러면 그냥 그게 자연스러워지고 그러려니 해진다는데 애석하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모든 걸 당연하게 미루고 떠밀고, 그렇게 밀리고 밀려나다 나도 잃고 아주 일차원적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그 마음마저 탁해질 듯했다.     


우스운 것이 함께 안 놀아줘서 나가는 데도 눈치가 보인다.

X 시어머니는 너 주말에 애 데리고 나가면 밥은 어쩌냐고 주어를 빼고 물었다. 이것만 봐도 너무 잘 알지 않는가.

애랑 나가서 돈만 쓰고 고생하는데 웬만하면 집에 있지 그러냐고 주말 끄트머리쯤에 그가 언짢은 표정으로 입을 뗐을 땐 퍼붓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외려 한마디도 못 했다.

아, 그렇게도 신경 쓰이고 걱정이 됐으면 같이 나가든가 잘하시지 그랬냐고 시원하게 쏘아붙여줄걸. 돌아보면 충분히 따박따박 대꾸하고 좀 더 야무지게 받아쳐도 충분했을 순간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소심하게 굴었던 순간이 너무 찌질하고 괴롭다.

하긴 그랬어도 뭐 크게 달라지고 나아지는 건 없었겠지만. 나대야 하는 순간에 입 다물고 말을 아껴야 하는 순간에 설치는 건 나만의 후회가 아닐 거라고 여긴다. 여전히 찌질이라 그래야 속이 덜 쓰리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이혼 뒤 아이와 함께 가뿐히 떠나고 체험하고 느끼는 건 홀가분하다. 아이가 어딜 가고 싶다, 뭘 보고 싶다고 해주는 게 오히려 반갑다.

입학하기 전 1월, 학교 가기 전에 비행기는 한번 타봐야 하지 않겠냐며 둘이 제주도로 떠난 적이 있다.

팬데믹으로 8살 인생 처음으로 타는 비행기, 아이는 김포공항에 가서도 믿을 수 없다며 들떴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른 아침 그 흥분에 기가 쏙 빨려 집에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3박 4일의 일정이었는데 한 손에는 트렁크, 한 손에는 아이 손, 어깨에는 짐가방. 렌터카 회사에서 메시지가 확인 안내가 계속 오는데 비행기 시간이 밀렸다. 와,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걸까. 진이 빠져서 미간이 풀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이륙하는 순간 아이가 찡긋 눈을 감고 손을 꽉 잡던 그 장면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거다. 제주도에서 제일 맛있던 게 천지연에서 먹은 맥도널드라고 속 뒤집히게 해맑게 웃던 감상도, 눈이 안 녹은 한라산을 보고 와그작, 하고 한 입 베어 먹고 싶다고 하던 소리 모두 훌쩍 어른으로 성장한들 못 잊을 기억이다.



아이를 위해 떠났다지만 어쩌면 나를 위한 거 아닐까.


데려갈 수 있을 때, 보여줄 수 있을 때 함께 무작정 떠날 수 있는 죄책감 없는 시간은 사실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인 것만 같다.

나 역시 몰라서 헤매고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기대기엔 한참 작은 아이를 믿을 구석이라고 생각하는 게 조금 창피하고 머쓱하지만, 혼자였으면 멈춰 있었을 순간 어떻게든 헤쳐나가려 동동댈 수 있는 건, 그래서 결국 풀어나갈 수 있는 건 모두 아이 덕분이다.  

그래서 파김치가 되다시피 해서 돌아오는 길에는 어쩐지 둘 다 자라 있는 기분이다.     


엄마로서 아주 조금. 저만의 세상을 보고 담아둘 어느 엉뚱하고 귀여운 어린이로 조금.     



기차를 더 안 본다고 기차역에서 드러눕기도 했고 수영장 휴식 시간을 이해 못 해 혼자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만 그랬기에 아이는 지금 누구보다 노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비가 오면 시원하게 다 맞기도 하고 바다가 보이면 홀린 듯이 신발을 벗는다.

바람 많이 부는 들판에서 뒹굴다가 한껏 꼬질꼬질해진 채 차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스르르 잠드는 모습을 보면 아이 때문에 나왔지만 결국 내가 더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절로 고맙다, 잘했다.라는 생각에 뒤범벅되어 울컥하곤 한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철없이 훌쩍훌쩍 떠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수영복 자국대로 건강하게 타버린 아이의 몸을 씻기다가 별안간 홀로 막연하고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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