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팅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깊고 진중한 관계 맺기가 조심스럽고 어려워진 작금의 현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너무나 가볍게 아니면 말고 식의 유혹을 하고 즐기는 게 취향이 아니라 그렇다. 깻잎을 떼네, 마네, 새우를 까주네, 마네 같잖은 꼴값들을 떨고 그걸로 연애 성향을 떠보는 걸 재미라고 하고.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라고 했으나 가만히 돌이켜 보니, 나는 그간 사귈 것도 아니면서 재미 삼아서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 전적이 있었다. 미안하다. 원래 인간이란 게 이렇게 자아 성찰이 안 된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대. 한 공공기관에서 무용 강사로 일할 때였고 그는 거기 소속된 공익근무요원이었다.
나이가 같았던 그는 내 사수에게 저 사람 괜찮다, 고 말을 흘려둔 상태였다. 그게 한 일 년 전부터였었다고도 했다. 그때의 나는 첫 연애를 끝내고 흥청망청, 될 대로 방자하게 살던 때였다. 그러던 참에 나 좋다는 남자? 그 재밌는 기회를 그냥 흘릴 리 없었다.
냅다 공익근무요원 대기실 앞에서 기다렸다. 이름은 방금 막 들어서 알고 도무지 얼굴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니 얼굴이라도 보고 오자는 심산이었다. 그 나이 때의 남자애들 우글우글한 사무실 앞에서 보란 듯이 삐딱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알아서들 그 친구를 불러 내 앞에 모셔두기까지 하더라. 끌려 나온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여드름 자국 있는 뺨에 뿔테안경,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내 눈도 못 보고 쭈뼛대는 게 그의 첫인상이었다.
“술 마실 줄 알아요?”
“네?”
“퇴근하고 술이나 한잔할래요? 우리 나이도 같다는데?”
말해두자면 지금의 나는 그런 박력이 없다. 눈만 끔뻑거리는 그에게 핸드폰 번호를 찍어주고 ‘저 근데 닭갈비에 소주 먹고 싶어요.’하고 돌아섰었다. 생각해 보니 겁나 어이없고 돌아이 같지 않은가? 근데 그게 먹혔다. 퇴근하고 나서니 남색 카라티에 까만 백팩을 얌전하게 맨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몇 살 많은 남자랑 3년을 만났는데 이십 대 초반 동갑 남자애가 얼마나 쉬웠을까. 이걸 어떻게 꼬드겨서 재밌게 갖고 놀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가볍고 책임감 없었으며 못 됐다. 그의 순수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기엔 거만했다.
“술 잘 드세요?”
아직도 있는 신촌의 닭갈비 집이 우리의 첫 데이트 장소였다. 냅다 소주부터 까서 잔에 가득 따르고 성급하게 짠, 하자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었다. 비죽비죽 흘리는 웃음이 바보 같았고 젓가락 한번 시원하게 못 뻗는 손길이 답답했다. 나 좋다는 사람이 싫을 건 없었다. 허나 별 매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쩔쩔매는 건 꽤 귀여웠다.
“너만 잘 마시면 난 계속 마시지.”
반말 찍 건네고 눈을 마주했다. 기겁하고 마음을 접든지 뭐든 마음 없는 하루치 호기심만 풀충전 된 내겐 알 바 아니었다. 근데 기겁은커녕 그게 제대로 어필된 모양이었다. 따라서 쭉 잔을 비운 그가 처음으로 싱긋 웃었기 때문이다.
MSG 아끼지 않고 팍팍 넣은 빨간 맛에 소주. 내 앞에 바쳐진 재물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남의 집 귀한 아들. 아주 쫙쫙 입에 붙는 시간이었다.
뭘 전공하는지, 어느 고등학교엘 다녔고 지금 어디 사는지, 마지막 연애는 언제였는지 같은 얘기를 하면서 보니 소주 8병이 비워진 채였다. 술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얘기가 재밌었다. 말을 놓고 술이 좀 들어가는 덕에 긴장이 풀린 그는 유쾌하고 구김살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겐 별 매력이 없었다. 술 잘 마시고 재밌는 술친구가 되면 몰라. 지금이야 그런 상황에서 적당히 선 그으며 친구 혹은 지인으로 지낼 노하우가 있지만 그땐 아니었다.
“근데 맨날 츄리닝 입고 다니다가 어떻게 오늘 치마를 입었대?”
헤실헤실 바보같이 웃기만 하던 그의 눈에 총기가 반짝였다. 마침 그날 기분에 대충 하고 나가기가 싫어 짧은 걸 입었을 뿐인데 얻어걸린 셈이었다. 술이 아무리 들어가고 농담과 빈말이 오가는 와중에 궁금한 모양이었다. 와, 근데 어떻게 맨날 츄리닝 입고 다니는 것까지 알았지?
“왜? 예쁘게 하고 있으면 네가 좋은 거 아냐?”
“아니 오늘 뭐 다른 약속 있거나 일 있던 건 아닌가 해서.”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럼 다행이고.”
“글쎄 너 만나려고 그랬나?”
뭐 이딴 소심함이 있지? 싶었는데 하도 진지한 얼굴과 솔직한 단어로 대답을 하길래 웃음이 터졌다. 들떠서 설렐 저 속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기왕 좋은 거 더 좋으라고 입 좀 털었다.
“그냥 예쁜 날인 거지. 난 모처럼 예쁘게 한 날 너도 알게 돼서 술 마시고 좋은데 왜?”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데 다시 그의 뺨이 볶음밥처럼 지나치게 붉게 물들었다. 그래, 뭐 노는 건데 뭔 말을 못 해. 물 같은 소주를 몇 잔 더 마시고, 그의 핸드폰을 뺏어 같이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책임감 없이 미친 듯이 흘리고 싶은 날이지 않았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나아가 사랑까지 하는 마당이면 오히려 재미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겐 진지해지니까 절로 뻣뻣하고 못나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진심이 아닌 나는 날아다녔다. 마시는 술이 늘어가고 연락이 늘어갈수록 쉬웠다. 이왕 웃을 거 한 번 더 웃어주면 되고 이런 말이 좋을까, 저런 말이 좋을까 신중하지 않은 덕에 턱턱 내놓는 말은 되려 그에게 톡 쏘는 재미가 되었다. 피 마르고 안달복달 난리가 나는 건 보기 좋았다. 남의 일처럼 재밌었다. 그 시절 나는 아주 값싸고 질 낮은 방법으로 자존감을 채울 수 있는 법을 알아버린 거다.
이미 나 좋다고 안달인 사람 앞에서 긴장도 없고 설렘도 없었다. 의미 없이 웃어주고 손 한번 잡고 싶어 옆으로 걷는 걸음을 눈치채고도 딴청을 부렸다. 어디 한 번 더 열심히 꼬셔 봐. 꼬신다고 넘어가 줄 것도 아니면서 애태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삼복더위에 같은 버스를 타겠다고 죽어라고 달려 버스를 잡아탈 정도로 날 좋아해 준 사람에게 그랬다. 물론 그 나이의 치기 어린 낭만이 그런 모양새이긴 하지만. 잠깐 감동도 받긴 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애정의 방향이 그리도 애석했고 나는 못 됐고. 그 애는 순진하고 순수하게 착했다.
“내가 뭘 하면 돼?”
놀 거 다 놀고 흥미가 시들해진 날 붙들고 그 애는 이렇게 물었었다. 너한테 내가 매력 없는 남자인 것도 알겠고 안 좋아하는 것도 알겠는데 해도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냐고. 침울한 그 얼굴에 다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성가셨다. 매번 똑같이 넘치게 좋아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인지도 모르고. 철저히 내게 을이 되어주는 이에게 성의가 없어진 거다. 애초부터 사랑이고 뭐고 아니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여태 그랬듯이 이제 내 눈치 보며 적당히 멀어져 주면 좋겠다고만 바랐다. 동시에 같이 좋아하면 행운이겠지. 그렇지만 아니면 어느 하나는 울고 다른 하나는 신경도 안 쓴다. 으레 모두의 썸이나 연애가 그렇듯이. 그리도 날 예뻐하고 좋아하던 그는 어느 한때의 에피소드가 되어 희미해졌다.
막말로 그 패기에 잠시 썅년 되는 게 뭐 무섭다고. 그렇게 내 몸짓 손짓 하나에 설레어 좋아하던 그를 잊어갔다. 그러나 우리 사는 세상이 어떤가, 너무나 좁고 척박하다. 카르마, 업보라는 건 반드시 있다. 업보는 생각보다 빠르고 세게 돌아왔다. 그를 다시 마주친 건 얼마 전 기온이 33도를 훌쩍 넘은 날이었다.
“…김지은?”
어느 회사에 들러 중요한 미팅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내 이름 석 자를 바로 부르며 불러 세운 목소리, 딱 그였다. 그는 더 찌질하고 순수하게 뜨겁기만 한 이십 대 공익근무요원이 아니었다. 멍청히 입을 벌리고 선 날 훑어보는 그도 반가움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안경 너머 십 년 전 버릇이 그대로였다.
그는 하필 내가 잘 보여야 할 위치에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말하기엔 지은 죄가 넘실대고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는 중이다. 일은 아직 진행 중이고 어찌 될지 모르는 상태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순간부터 기대를 버렸다. 잘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나 같아도 날 갖고 놀던 과거의 누군가를 잘 봐주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십 년 전 얕은 플러팅의 대가가 이리도 날 초라하게 만드는 거다. 요리조리 어떻게든 피해 다니고 안 마주치려고 애쓰는 지금의 날 알았다면 과거에 그따위로 굴진 않았을 거다. 절대로.
제대로 조진 거지 뭐. 큰일이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