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아스퍼거 진단 -2
아스퍼거 진단을 받은 후 A 소아정신과, 오은영 클리닉 두 곳에서 아들의 치료를 병행했다.
우리 부부는 모든 치료에는 골든 타임이 있고, 어릴수록 치료가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주중에 7~8개의 치료 스케줄을 잡았다.
조그만 우리 아들은 매일 센터에서 받아야 하는 치료들을 불평하지 않고 잘 따라줬다.
나는 주중에 아이를 데리고 센터를 전전했고,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자폐, 아스퍼거 관련 책들을 검색해서 읽었다.
센터의 치료와 병행해서 가정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들을 알고 싶었다.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책 속 글자에 집착했고, 매일 퇴근한 남편에게 책에서 찾아낸 절망들을 알리며 통곡했다.
남편은 내 비통함을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아스퍼거 관련 자료들을 찾아서 읽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의지했고, 누구에게도 아이의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폐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니 ‘뇌가소성’이라는 용어가 반복해서 등장했다.
뇌가소성(Neuroplasticity Theory)이란 인간의 뇌는 자극과 학습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심지어 손상을 입은 뇌도 지속적인 학습, 걷기 등의 운동을 통해서 그 기능이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뇌가소성을 간절히 믿으며, 날마다 두 시간 이상씩 아이와 걸어다니고, 자전거를 태우며
아이가 좋아질 거라고, 평범하게 성장할 거라고 희망을 품었다.
네 살이었던 아들은 내 손을 꼭 잡고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그 좁은 보폭으로 걸어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센터로 향했고, 여러 치료들을 차분하게 받았다.
나는 내 아들과 보통의 얼굴로, 보통의 대화를 나누길 꿈꿨지만, 아들은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고, 대화를 잇지 못했다.
그저 좋아하는 자동차 이야기만 무한 반복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 나에 대한 분노, 아들에 대한 애잔함과 책임감 때문에
죽고 싶기도 했고, 죽을 수 없기도 했다.
또래와 다른 내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지만, 최악의 모습으로도 비난했다.
아들은 온통 뾰족한 엄마 대신 따뜻하고 편안한 아빠 곁에 있으려고 했다.
추운 겨울 저녁, 오은영 클리닉에서 한 차례 치료를 받은 후 다른 치료를 위해서 A 소아정신과로 향하는 길에
피곤했던 아들은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버스 안에서 깊게 잠들어 버렸다. 아무리 흔들어도 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까 봐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아이의 물품으로 가득 찬 배낭을 급하게 앞에 메고, 잠든 아들을 등에 업었다.
아이를 업고 육교에 올라가려고 계단에 발을 내딛는데, 모든 계단에 얼음이 다져져서 울퉁불퉁한 빙판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겁에 질려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겨우 높은 육교 위로 올라갔다.
육교 위에서 내려가려고 계단을 바라보니, 잠들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들을 업고
도저히 그 미끄러워서 위험해 보이는 계단을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빙판으로 뒤덮인 이 어두운 육교가, 잠든 아이를 업은 채 무서워서 내려가지 못하는 이 상황이,
나와 내 아들 앞에 펼쳐진 미래 같아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지 못하고 육교 위에 서서 울다가 마음을 다잡고 등 뒤에서 잠든 아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야, 일어나, 걸어야 돼. 엄마가 도저히 혼자 못하겠어. 엄마 좀 도와줘. “
그 순간 추운 밤바람때문에 잠이 깼는지, 아들이 등 뒤에서 뒤척이더니 땅에 내려서 내 손을 꽉 잡고 걸을 준비를 했다.
잠이 덜 깬 채 걸으려는 아들이 고마워서 나는 한 손에 아들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로 계단 난간을 붙잡고
차가운 육교를 겨우 내려왔다.
아픈 아들이 헤매고 있는 나를 이끌어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