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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 민음사(2019)

Yeni Hayat by Orhan Pamuk

by 앨리의 정원

저자 - 오르한 파묵, 역자 - 이난아


1.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 노발리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나는 이 빛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었다.

혹은 그 안에서 빛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는 새로운 인생이 이 안내서 속에 들어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어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나의 갈 길을 찾으려 애썼고,

한편으로는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 수도 있는 경이로운 상상들을 하나하나 꿈꾸고 있었다.


여행이 있었다.

항상 여행이 있었다.

모든 것은 여행이었다.

그때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다가도 사라져 버리고,

오랜 세월 동안 죄악이나 불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던 부드러운 시선을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되고 싶었다.

그 시선을 통해 바라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싶었다.



5


우리는 우리 얼굴에 비친 책의 빛 때문에 길을 나섰고,

직감을 따라 그 길을 나아가려고 했으며,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고들은 출구야, 출구는 사고들이고…

천사는 그 출구가 시작되는 순간의 마법 속에 있지.

그리고 그때 인생이라는 소용돌이의 진정한 의미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

그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6.


나는 책은 죄가 없다고 말했어.

이와 비슷한 책은 수도 없이 많이 있다고도 했어.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사람이 그 속에서 보았던 것들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어.



8.


“불의와 악은 사실상 세상 어느 곳에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선을 유지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자신의 사랑이 보답을 얻지 못하자 상대가 이해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9.


아버지들은 왜 이렇게 자부심이 넘칠까?

왜 이렇게 맹목적으로 잔인한가?

그의 눈이, 안경 너머로, 굉장히 작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똑같은 눈을 그 아들에게서도 보았다는 것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의 내면에서 예상치 못했던 보석을 감지하곤,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친구들과 사귄다고 해서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그와 친구 또는 가까운 사이가 되길 원했다.


그의 가게에는 파리들과 노인들만 들락날락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과 시간을 살고 싶었기 때문에 조상들이 몇백 년 동안 사용해 왔던 익숙한 물건들을 다시 팔기 시작했다.


연필로 쓴 글, 즉 연필을 쥔 손의 일부를 이루며, 손을 움직이게 하고 머리를 행복하게 하는,

그리고 그 머리를 반짝이게 하며 영혼의 슬픔과 호기심, 다정함을 표현하는 글.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모아 나와 시간을 정리했지.

나는 나 자신을 믿었어.

내가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나의 의지와 내 인생의 시를 믿었다네.

그들을 내게 결속시켰지.

이렇게 해서 그들도 자신들의 시간을 발견했다네.



12.


아이들에게 묻곤 하잖아.

얘야, 왜 우니 하고.

사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울면서도,

아이는 물어보는 아저씨에게 파란색 연필깎이를 잃어버려서 운다고 말하지.


나처럼 책 때문에 인생을 망쳐 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책을 철저하게 건강한 방식으로 소화해서 평온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모든 세계를 바꾸어 놓고, 내 운명을 뒤흔들어 버린 책이

어떻게 이 사람에게는 비타민제처럼 작용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제 죽음이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정원에 없어서는 안 될 나무, 거리의 친구처럼 받아들였고, 거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또 그는 어린 시절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과거에 스쳐 갔던 사소한 것들, 가령 풍선껌이나 만화책 같은 것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첫사랑이나 그가 읽었던 첫 번째 책도 모두 그의 인생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13.


그는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다.

인생에서 다른 무엇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책을 사랑하고 믿었다.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의 인생이 있었고, 그의 말에 의하면, 모든 인생은 똑같았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도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의 시작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찾아야 할 것은 시작과 끝이 없는 어떤 장소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14.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단지 내 온 인생을 바꾸어 버린 책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러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상처 입은 내 인생에 깊은 어떠한 의미를 주려고도, 위안을 찾으려고도,

더욱이 슬픔의 아름답고 존중할 만한 부분을 찾으려고도 절대 시도하지 않았다.

때로, 계속해서 여러 권을 읽으면 그 책들끼리 속삭이는 게 들렸고,

이렇게 해서 내 머릿속이,

모든 구석에서 각각의 다른 악기가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릿속의 이 음악 때문에 내가 인생을 견디며 산다고 인식했다.



17.


인생은 사실 이렇다.

사고가 있고, 운이 있고, 사랑이 있고, 외로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고, 빛과 죽음, 그리고 있을 듯 말 듯한 행복이 있다.





나는 심약하고, 분명치 않으며,

하찮고, 깨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평온을 구한다.



Orhan Pamuk (1952 - )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다가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출간하고 ’오르한 케말 소설상’, ’밀리예뜨 문학상‘을 받았다. 다음 해에 <<고요한 집>>으로 ’1991년 유럽 발견상‘을, <<검은 책>>으로 ‘프랑스 문화상‘을 받았다. <<새로운 인생>>은 튀르키예 문학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내 이름은 빨강>>으로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 이탈리아 ’그란차네 카보우르 상‘ 등을 수상했다. 2002년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소설이라 밝힌 <<눈>>을 출판하고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평화상’, 프랑스 ’메디치상’,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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