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우리들> (2016)
"애들이 일 있을게 뭐가 있어?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하고 놀면 되는 거지 뭐"
영화 <우리들>의 선이가 묵묵부답으로 고통을 삼키고 있을 때 선이의 아버지가 내뱉은 말이다. 하루하루 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어린이라고 해서 고통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본인 때문에 지아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알코올 중독자의 딸이라고 놀림을 받고 돌아온 선이에게 아버지가 술을 따며 내뱉는 말은 너무 시리다.
어른이 된 우리는 왜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졌을까?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을 거쳐서 어른이 됐다. 하지만 어느새 어린이가 되어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때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동심을 잃는다는 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연호에게 얻어맞은 윤이에게 "맞았으면 다시 때려야지"라며 화를 내던 선이는 윤이의 "그냥 놀고 싶다."는 한 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선이는 지아와 목적 없는 다툼을 이어갔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앙갚음이 아니라 지아와 그저 같이 놀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냥 지아랑 놀고 싶은 게 전부인데, 왜 그게 안 되는 걸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무던해지며 어른이 되어가는 선이는 윤이의 한 마디에 할 말을 잃고 만다.
마음의 선을 넘어온 너, 그리고 하나 된 우리들
주인공의 이름이 '선'인 것처럼, 우리들 마음의 선(line)을 넘어온 '너'는 어떤 존재일까? 영화 초반부 선이는 피구 게임 중 '선'을 밟았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선이는 지아가 '선'을 밟았다며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선을 밟지 않는 것을 봤다며 지아를 지켜준다. 고토록 상처를 주고받았음에도 서로를 마음의 선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어린 시절 친구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같이 놀 친구, 같이 밥 먹을 친구, 같이 숙제할 친구는 때로 부모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였다. 친구가 없다는 것, 무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영혼의 상실과도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들'은 쉽게 떼어놓지 못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사회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은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내보내는 데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
아직도 착하면 '호구' 잡힌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을 향해
영화 속 보라는 영악하기 그지없다. 무리를 만들고 희생양을 찾으며 자신의 세를 과시한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과 먼저 닮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지아를 시기해 왕따 시킨다. 과거 친했던 선이를 내칠 때도 "넌 항상 나만 나쁜 사람 만들더라"라는 말처럼 '어른'스럽지 못한 선이를 못마땅해 여겼다. 선이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렸다. 마치 착하면 '호구' 잡힌다는 말처럼 베풀 줄만 알고 이기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계속 마음을 다잡는다.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온 지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랑하려고만 한다.
'나' 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사랑하고자 하는 선이를 응원하게 된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잠깐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 선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행복을 쟁취하게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어른들을 응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자기 몸무게보다 수십 배나 큰 무게를 지고 가는 선이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렇지만 그 무게를 삼켜낸 만큼 선이의 삶은 더욱 찬란하고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반짝임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