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45개국 세계여행가 데이지 여행 일기장 : 북/동아프리카
세계일주 280일 차, 나는 유럽 여행을 마치고 케냐로 향하기 위해 탑승 게이트에 있었다. 긴 대기 시간에 케냐 사람들은 저마다 춤을 추거나,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 나눴다. 옆에 앉은 케냐 승객은 미소 지으며 내게 친근히 말을 걸었다. 이내 오른 비행기는 케냐 나이로비 활주로에 착륙했다. 뭉실 떠오른 구름 사이로 나이로비 전경이 보였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 음성 너머로 한 케냐인 남성이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착륙을 즐거워하는 어린아이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나이로비 공항에 닿기 전부터 만난 케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친화력에 나는 이미 케냐에 대한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낯섦의 끌림을 가득 안고, 나는 동아프리카에서의 첫 여정을 시작했다.
<데이지 세계일주 아프리카 일정>
북/동아프리카 여행(56일)
이집트(16일), 케냐(6일), 탄자니아(18일), 잠비아(6일), 보츠와나(3일), 남아프리카공화국(11일)
7월 13일 - 7월 28일 이집트: 다합, 블랙 사막, 헤이즈, 크리스털 사막, 아그바트, 화이트 사막,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12월 2일 - 12월 7일 - 케냐: 나이로비, 마사이마라 국립보호구역, 마사이마라 마을
12월 7일 - 12월 24일 - 탄자니아: 모시, 킬리만자로, 잔지바르, 다르에스살람
12월 24일 - 12월 29일 - 잠비아: 몬제, 루사카, 리빙스톤, 모시 오아 툰야
12월 29일 - 12월 31일 - 보츠와나: 카사네, 가보로네
12월 31일 - 2024년 1월 10일 -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케이프타운
나는 지난 16일간 북아프리카와, 40일간 동아프리카 5개국을 여행했다. 광활한 대지를 걸으며 아프리아의 숨결을 느꼈고, 야생의 생존투쟁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쾌활한 아프리카 사람들 속에서 누구를 만나도 한결같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사람들의 열린 마음과 쾌활한 웃음은 매 순간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고, 언제나 '하쿠나 마타타(문제없어!)'를 외쳤다. 아프리카 여행은 웃음과 유쾌함으로 가득한 날의 연속이었다. 물론 아프리카 여행이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사기와 강도 등의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여행을 떠올리면 순수하고 에너지 많은 사람들과의 웃음이 남았다. 나는 지난 56일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정리하고, 새로운 대륙,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새 여정을 앞두고, 아프리카에서 얻은 느낀 점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장을 펼쳤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 동아프리카 5개국은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의 연속이었다. 킬리만자로를 품은 탄자니아 모시에서의 추억이 그랬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현지 친구를 따라 모시 마을로 들어가면,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도로로 이어졌다. 비가 억수로 내리면, 길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한국 시골 마을에 온 듯했다. 버스정류장은 없기에 버스로 보이는 승합차를 보면 손을 흔들어야 했다. 승합차 안내원은 행선지를 외치며 손님을 불렀다. 길 위에서 사람들은 늘 다가와 말을 건넸다. 탄자니아의 보석이라 불리는 잔지바르도 다르지 않았다. 유명 관광지로 발달된 지역에서도 도로 공사로 며칠씩 통제가 이어졌고,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한 버스는 삐걱거리며 출발했다. 한 번은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잠비아 카피리 음포시까지 이동하는 1,860km 열차에 올랐다. 와이파이가 전혀 잡히지 않는 기차에서 며칠을 보내며 중간마다 정차하는 역 마을을 둘러봤다. 역 근처 시장은 언제나 북새통이었다. 사람들은 구운 옥수수, 망고, 바나나, 각종 과자를 바닥에 깔린 천위에 올려놨다. 아이들은 외국인을 찾아가 음식을 달라며 혀를 내밀었다. 상인은 머리에 큰 짐을 이고 바삐 오갔고, 손님이 건네는 꼬질꼬질한 지폐를 세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시장 체계를 알 수 없었지만, 소란 속에서 정겨움을 느꼈다. 아프리카가 발달되기 이전의 모습을 눈으로 담을 수 있어서 괜스레 웃음이 피었다.
아프리카 여행 중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음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첫 번째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동아프리카 사람들은 대게 재료 자체를 답했다. "나는 계란을 좋아해!", "나는 콩과 멸치가 좋아." 나는 '비빔밥', '피자'와 같이 조리 요리를 전제해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해 왔지만, 이들이 본래 재료를 말하는 게 신기했다. 실제로 케냐와 탄자니아의 음식은 대부분 기본 재료를 단순히 조리하는 형태였다. 특별한 양념이나 다양한 가공법 없이, 재료 자체가 곧 요리라는 인식이 있던 것이다. 언어에서도 이런 특징이 나타났다. 현지 언어나 스와힐리어는 요리 이름 자체가 특정 재료와 같이 쓰였다. 한국의 김치찌개는 재료를 의미하는 김치와 조리법을 뜻하는 찌개의 합성어이다. 이와 반대로 아프리카 주식 우갈리는 옥수수 가루로 반죽한 음식이란 뜻이다. 한국은 쌀 대신 밥을 말하지만, 이들은 재료 이름 그대로 음식을 사용했다.
두 번째로, 음식의 범주가 달랐다. 예를 들어 나에게 바나나는 간식이나 디저트이지만, 동아프리카에서는 주식으로 쓰였다. 이들은 바나나를 으깨서 고기와 끓여 먹었고, 식당마다 불판 위에는 구워진 바나나가 놓여있었다. 이들은 밥 대신 바나나로 배를 채웠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바나나에 대한 범주를 넓혔고, 다른 음식들도 기존에 가졌던 이미지를 깨뜨릴 수 있었다.
세 번째로, 음식에 대한 정체성이 달랐다. 내가 만난 현지 친구들은 식사가 생존과 같았다. 하루치 재료를 사 와 매 끼니를 해결했었다. 그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안된 적도 있었다. 케냐에서 10대 아이들과 나눈 대화였다. "얘들아! 너희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쇼콜라!" "초콜릿을 좋아하는구나! 나도 초콜릿 좋아해!" "쇼콜라···. 쇼콜라?" 여기서 쇼콜라는 스와힐리어로 음식(Chakula)을 의미했다. 나는 음식을 말하는 아이들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초콜릿을 먹어본 적이 없었고,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한참 뒤에야 아이들 답변을 이해했다.
동아프리카 여행을 돌아보면, 머릿속에 가득한 이미지는 흥 넘치도록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이었다. 동아프리카 사람들은 대체로 호탕하고 유쾌했고, 언제나 미소와 춤으로 삶을 즐겼다. 케냐에서 현지 친구를 따라간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예배당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은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춤을 추며 노래했다. 나는 한국에서 경건하게 진행되는 찬양만 봤었고, 케냐 교회에서 벌어지는 콘서트 같은 찬양이 신기했다. 사람들은 교회에 울리는 배경음에 맞추어 리듬을 탔다. 종교 행사에서도 그들의 흥을 깊게 느꼈다. 보츠와나에서 만난 가족도 비슷한 경우였다. 보츠와나에서 만난 가족도 비슷한 경우였다. 가족들은 교수와 작가, 과학자 등 내로라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위에서 주는 무게는 온데간데없이 이들은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내게 다가왔다. 홀로 앉아있는 나에게 말을 걸며 갑자기 원숭이 흉내를 내며 외쳤다. "호롤롤로 ~~~!" 인중을 내밀고는 턱과 정수리를 긁는 이들은 아프리카 전통문화의 표현 방식인 울루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결혼식, 축제나 종교 행사에서 축하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몸짓과 소리였다. 엘리트층 가족이 "릴릴리~"하며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에 처음에 당황하면서도 흥을 느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 이들은 기쁠 때 춤추고 웃는 법을 알고 있었다. 흥 많은 이들과 어울리는 내내 나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즐길 줄 알고, 행복해할 줄 알고, 미소 지을 줄 알았다. 니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에너지를 통해 삶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아프리아 현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 흠칫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족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엄마를 두거나, 형제라고 부르지만 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탄자니아에서 만난 친구는 같이 살고 있는 이를 가족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소개에 나는 자연스레 생물학적 가족을 떠올렸지만, 대화를 나누며 혈연 가족이 아닌 걸 깨달았다. 둘은 같은 마을에 사는 부족이었다. 이들은 생물학적 가족이 아니어도 같은 마을 단위에 사는 사람을 가족이라 불렀다. 아프리카의 가족 개념은 서구권이나 한국처럼 혈연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에게 가족은 혈연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아프리카가 부족 사회가 발달된 것은 부족한 공적 제도로부터 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해서여 싸. 공동체적 가족 관계를 통해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아프거나 경제적으로 힘들 때 부족 가족이 함께 돌보는 식이다. 실제 탄자니아에서 만난 다른 친구는 탄자니아 초원 지역 반유목민 부족인 마사이족이었는데, 경제적 여건으로 키우지 못하는 가족은 자식을 다른 가정에 위탁 보냈다. 친구는 말했다. "경제적 여건으로 새로운 가족 아래에서 자랐지만, 혈통 가족과 지금도 연락해." 이들에게 가족은 생물학적 혈연보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혈연 중심으로 이루어진 좁은 범위의 가족을 넘어서 아프리카 가족관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소속감의 가족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피를 나누지 않아도 공동체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힘을 느꼈다. 이런 문화를 접하면서,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언제나 가족 같은 마음과 따뜻함을 느꼈다.
아프리카 대륙은 GDP 총액으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대륙이며 절반 이상의 국가는 UN의 최빈국 분류에 속해있다. 여행 전부터 경제 지표로 알고 있던 사실을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러나, 내가 충격받은 부분은 단순히 가난 자체가 아니었다. 이들이 스스로를 '가난하기에 언제든지 받아야 마땅한 존재'라고 여기는 점이었다. 케냐의 한 슬럼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동정이 익숙한 눈빛으로 말했다. "안녕? 냄새가 심하지? 우리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어 영상 찍고 있니? 내가 가이드해줄게!" 아프리카 사람들은 에너지 있고, 쾌활했지만, 가난 속에서도 유쾌하게 돈을 요구했다. 그들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상대보다 본인이 낮은 게 당연하고, 이들에게 구걸은 삶의 일부처럼 보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난하고, 패배자이며, 도움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팽배한 게 느껴졌다. 비슷한 경험은 계속 이어졌다. 탄자니아에서 만난 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인사가 왔을 때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에게 돈을 조금 보내줄 수 있어? 지금 궁핍해서 너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수 있니?" 하루는 탄자니아 잔지바르 선착장에 데려다준 친구가 말했다. "바래다준 대신 나한테 돈 좀 줄래? 점심을 사 먹어야 해" 한참 웃으며 이야기 나누다 헤어지는 순간에 들은 친구 말에 친구라 믿음 마음에 배신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번은 탄자니아 현지 마을에 놀러 가 내 번호를 받아간 이웃이 마했다. "나에게 한국 남자소개해줘야 해! 드디어 나도 외국인 남자친구와 결혼하는 건가! 내 인생은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여행하며 만난 친구와 안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결혼을 위해 아는 한국인을 소개해 달라, 자기에게 돈을 기부해 달라는 등의 부탁은 아프리카 친구들에게서만 왔었다. 이들은 단순히 묻는 안부에도 기부나 지원을 부탁하곤 했다. 그 속에서 이들이 구걸하는 게 익숙하고, 굽히는 게 당연하게 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탄자니아에서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NGO를 운영하는 한 친구는 말했다. "너는 이렇게 여행할 기회를 가졌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아. 내가 자란 곳은 음식을 먹지 못하여 참혹한 사람들이 많았어. 그들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음식을 먹으니 최소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여전히 배고프지만 최소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너도 이곳 여행을 통해 감사함을 가지면 좋겠다." 아프리카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쾌활하며 에너지가 넘쳤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에 가려진 가난한 인식이 있었다. 나는 당연하다고 누려온 삶의 조건들이 당연한 게 아니란 사실을 여행 내내 실감했다.
앞서 아프리카 빈곤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했다면, 반대로 부유한 아프리카 국가를 깨닫기도 했다. 아프리카 안에도 부유한 국가가 있었고, 중상류층의 생활을 누리는 이들도 있었다. 대륙 전체를 가난하다고 일반화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크게 체감한 곳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이었다. 남아공은 도시마다 입법, 행정, 경제 역할을 분담해 발전해 왔다. 금융의 허브인 요하네스버그 거리는 한국 강남처럼 높은 빌딩과 잘 포장된 도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 종착지로 도착한 남아공은 이전에 거친 동아프리카와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하루는 입법 수도인 케이프타운을 튀르키예 친구와 걷고 있었다. 쇼핑몰과 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보며 나는 말했다. "남아공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랑 다른 거 같아." 요트 선착장을 지나며 친구는 대답했다. "백인이 직접 와서 지배한 국가니까 다르지." 남아공에 머무는 동안, 내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백인 아프리카인을 만나 때면, 나는 이들도 아프리카인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되새겨야 했다. 서구 사회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남아공 거리를 걸으며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새로운 색채로 입혀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아프리카의 미래를 미리 엿본 듯했다. 아프리카가 마냥 가난하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했다면, 그 사실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순간들이었다.
또한 아프리카의 종교 범주를 확장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이슬람을 서아시아의 전유물로 생각했는데, 아프리카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프리카 인구의 40% 이상이 무슬림이며,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북아프리카는 90% 이상이 무슬림이다. 탄자니아 잔지바르는 주민 90% 이상이 히잡을 두르며 살아갔다. 나는 아프리카에 스며든 이슬람 문화를 처음 접할 때 낯설어했지만, 내가 아프리카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아프리카 이미지를 넘어 백인, 무슬림을 비롯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다채로운 아프리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아공에서 1948년부터 1990년대까지 시행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1990년대 초반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1994년에는 첫 다인종 민주 선거가 실시되며 아파르트헤이트는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그러나,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남아공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였지만, 그 뒤로 흑인과 백인의 차별이 공고히 느껴졌다. 요하네스버그 일부 거리는 한국 강남을 떠올리게 했지만,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흑인 노숙자와 텐트가 늘어서고, 마약 냄새가 가득한 거리가 드러났다. 통합과 다인종을 외치는 남아공이지만, 현실에서는 흑인과 백인, 혼혈인의 뚜렷한 구분이 존재했다.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의 안내원은 내게 경고했다. "흑인들이 모여사는 곳은 절대 혼자 가지 마세요." 그의 굳건한 말에 남아공이 가진 차별 정책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못한 사실을 실감했다.
아프리카는 치안상 위험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굳이 한 섹션을 할애하며 언급하고 싶은 이유는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에게도 위험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케냐에서 달러 인출을 위해 백화점으로 향했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말이 닿았고, 그는 4개월 전 당한 사고를 들려주었다. "나는 나이로비에 10년 넘게 살았어. 익숙한 마을이니 밤에 잠깐 나왔는데, 괴한이 나를 습격해 시력을 잃었어." 그는 수술 후 진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편하고 익숙한 마을에서 순식간에 두 눈을 잃은 것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아공에서 만난 친구는 최소 세 번 이상 강도를 당했다고 말했다. 남아공에서는 강도를 겪지 않은 이를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본인 경험을 털어놓았다. "강도가 주머니에 총이 있다고 위협하며 돈을 주면 그냥 지나가겠다고 말하더라. 얼마 쥐어주니까 나를 껴안으며 고맙다고 말하고 그냥 갔어." "한 번은 칼 시늉이 너무 허접해서 강도한테 말했었어. "이걸 강도라고 하는 거야?" 앞서 말했듯이 남아공은 흑인과 백인사이의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친구는 헤드셋을 낀 채로 거리를 걸은 적이 없다고 했고, 요하네스버그 거리는 대로별로 빈과 부의 참혹한 실상을 보여주었다. A 대로는 노숙자와 흑인 노동자가 술을 마시며 앉아 있지만, 한 블록을 지나면 B 대로는 깨끗한 거리와 사람 하나 없었다. 경제 권력을 쥔 백인은 거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행을 통틀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거리는 가장 삭막하고 위험한 거리였다. 나 역시 남아공 거리에서 강도를 당하며, 안전한 한국에 익숙해진 안일함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매번 이방인을 향한 따뜻한 환대를 느끼던 내게, 아프리카 여행은 상상이상의 위험과 긴장감으로 경고를 주었다. 지난 여행지였던 인도와 아프리카를 비교하자면, 사기르 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인도인은 허술하게 속임수를 쓰며 우기는 방식이라면, 남아공은 총을 직접 들고 속으라고 강요하는 경우였다. 남아공 강도는 누군가를 죽여도 본인 삶이 더 처절하지 않다는 눈빛을 갖고 있었다. 모든 경험 속에서 나는 아프리카 여행 내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를 느꼈다.
국경을 막론하고 사람을 하나로 묶는 힘은 소프트파워였다. 모두가 같은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스포츠인의 땀방울에 열광했다. 세계일주를 하며 소프트 파워로 한국의 위상을 언제나 느꼈지만, 아프리카 여행은 조금 색달랐다. 아시아에서는 어딜 가나 K-pop이 들렸고, 유럽에서는 영화 [기생충]과 한국 문화 산업을 논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국에서 왔다는 나에게 동일하게 말했다. "손! 미스터 손!" 이들은 한국 축구선수인 손흥민을 알고 있었다. 탄자니아 작은 시골마을 사람들은 K-pop을 듣지 않아도 손흥민에 열광했다. 문화적 인프라의 부족은 물론, 생활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도 전 세계를 연결하는 관심사는 스포츠였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 내내 스포츠가 가진 힘을 다시금 실감했다.
지난 56일간의 아프리카 여행이 빠르게 스쳐갔다. 행사용 컨테이너를 세운 듯한 케냐 나이로비 공항의 풍경이 생생한데, 어느새 면세점과 라운지를 갖춘 남아공 케이프타운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브라질행 장기 비행기에 오르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비행 루트가 표시되던 좌석 화면이 꺼지니 반사된 내 얼굴이 보였다. 나의 허름한 모습은 세계일주 319일 차를 나타내는 듯했다. 이미 안대를 낀 채 잠에 빠진 승객을 보며 메모장을 다시 펼쳤다. 지난 여행을 통틀어 배운 것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319일간 세계일주를 다시 되새겼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문제해결능력이 성장했다. 현실을 즉시 하고,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파악하며 가능한 최선을 선택을 하는 법을 배웠다. 선택의 순간을 직감하고, 순간의 적절한 결정을 내리며,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습득했다.
한국에서 나는 쉼 없이 바쁘게 살아오는 게 익숙했다. 여행 초반에도 일정은 빡빡했고, 그 나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경험하려고 노력했다. 아침마다 눈뜨면 바라보는 천장이 매일 바뀌는 삶이었다. 그러나, 여행이 장기화되면서 휴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반드시 모든 명소를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 오히려 휴식을 통해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루는 정신없이 아프리카 횡단을 쭉 마치고 종착점인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케이프타운에서 즐길 활동이 있었지만, 나는 하루 종일 낮잠을 자고 천장을 바라봤다. 어떠한 완벽주의도 개입할 수 없는 시시한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머무름의 달콤함을 느꼈다. 지나간 순간을 보내고, 오로지 현재를 느끼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계속 달리기만 하던 내게 세계일주는 머무름의 가치를 알려주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게 행복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세계일주를 하며 만난 180명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를 물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태국에서 만난 두 아들의 엄마에게 '가족'이라 답을 들었다. '가족'을 이유로 살아간다는 개념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고, 당시 나는 답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일주가 300일을 넘어가며 가족을 비롯한 관계에서 나오는 소중함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아시아에서 만난 한 부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했고, 사업적으로 성공해 부를 이루었지만, 최고의 성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성공한 삶을 살아도, 엄마가 되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없어" 그의 답은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만난 친구는 세 아들의 엄마였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로 중국 유학을 다녀왔고,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관광업과 학교 교사로 동시에 일했다. 그는 수많은 일을 병행하면서도 엄마라는 직업을 해내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머물면서, 나는 자식을 향한 그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걸 느꼈다. 하루는 가족 다 같이 놀이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들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나서 피곤에 떼를 쓰고, 이동 차량에서 용변을 누었다. 전쟁터와 같던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울고 있는 아들을 달래고 잠재웠다. 곧이어 내게 밥을 차려주며 말했다. "데이지, 배고플 텐데, 이거 먹고 자" 본인도 피곤하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나의 저녁까지 챙기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가 조용히 쟁반을 건네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강해 보였다. 영락없이 어린이 같던 내 모습에 친구의 모습은 엄마가 누구보다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나는 메모장을 덮은 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엊그제처럼 느껴지는 아프리카에서의 첫날이 어느새 끝났다는 사실에 코 끝이 찡해졌다. 드넓게 펼쳐진 아프리카 초원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호롤롤로-"라며 방정 있게 미소 짓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떠올랐다. 순수하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이들 덕분에 아프리카의 모든 순간이 찬란했다. 광활한 대지를 가슴에 품은 채, 나는 새로운 대륙인 남아메리카로 가는 비행에 몸을 맡겼다.
데이지 (신예진)
yejin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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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신예진(데이지)은 스스로 돈 벌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었습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련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