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푼타 아레나스에서 만난 마누엘라
새벽 12시 30분.
푼타아레나스의 밤거리를 걸으니
고향 밤거리를 걷는 기분이다.
괜스레 불어오는 어릴 적 향기에
오래전 들었던 노래를 꺼낸다.
헤드셋에 울려 퍼지는 어린 시절 노래와 함께
남아메리카 대륙 끝의 바닷가를 거닌다.
푼타 아레나스 호스트 마누엘라 집은 안락하고 편안하다.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마누엘라는
저녁에 도착한 나를 보며 다음날 아침에 보자고 인사한다.
"나는 이제 병원에 가야 해.
집처럼 생각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
파스타에 치즈와 계란을 넣어 마음껏 배를 채운 뒤,
푼타 아레나스의 바닷가 거리를 거닌다.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앉아있는 여성을 본다.
어릴 적, 고향 바닷가에서 홀로 가던 순간을 떠올린다.
학교를 마치고 무슨 센치한 바람이 불었는지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지난 나의 모습.
바닷가를 함께 산책하는 부녀의 모습을 본다.
개구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논 밭 둘레를 아빠와 함께 산책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아빠와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걸은 게 언제였더라.
내 살곁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때문일까,
늦은 밤거리도 우수에 젖은 채 걸을 수 있는 동네의 안전함 때문일까,
지나온 시절의 소중한 순간이 바닷가 위의 퍼진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대륙 끝에 있는 푼타아레나스.
고향 마을과 비슷한 이곳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 편안함은 감성에 젖은 내게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차가운 공기와 바람, 바다.
붉고 푸른 신호등.
차가운 공기와 아름다운 하늘.
고향이 가진 것과 같은 요소를 가진 푼타 아레나스.
푼타 아레나스의 아늑한 새벽을 보내기 아쉬워,
한 달 남짓 남은 세계여행을 보내기 아쉬워,
잠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괜스레 이불을 붙잡고 흐르는 시간을 바라본다.
나는 마누엘라와 다음날 라면집에서 만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라면 가게가 있는지 몰랐다며
호기심을 보인 마누엘라와 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이야기 나눈다.
마누엘라는 물리치료를 공부해 병원 일을 시작했다.
농업경제학을 1년 공부하다
쭉 병원 일을 해온 그는 서른 살이 되어 유럽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다.
"완전히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어.
프랑스 맥도널드에서 일하고, 워크 어웨이(workaway)도 했었지."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벨기에에서 한두 달 살다
다시 원래의 병원 생활로 돌아온 그는 허탈한 웃음으로 말한다.
"다음 여행은, 40살 즈음에야 하지 않을까?"
*워크 어웨이(workaway): 사전 합의한 하루 근무 시간에 대한 대가로 홈스테이와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는 플랫폼 (위키백과)
우린 다른 울타리 속에 있던 딸기를 몰래 따먹으며 킥킥 웃기도 하고
대륙 끝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잔잔한 대륙 끝 바다의 아늑한 지평선 너머로부터
오랜 세월 혼자 있던 이에게 느껴지는 고독감이 느껴진다.
슬슬 져가는 해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난다.
마누엘라는 말한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어.
죽음을 마주한 이들의 끝을 보면서 확신한 게 있어.
숨 쉬고 살아있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 말이야.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삶이 있지만, 살지 못하는 거야.
그건 사는 삶이 아니잖아. (The life is not living)"
깊은 고요함을 품은 바다는 자신의 우울을 한없이 내뱉는다.
수많은 이들이 바다를 찾아 자신의 슬픔과 우울을 토해냈고,
남동 고색의 바다는 모든 우울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흘러가게 둔다.
"나는 고통의 시간 없이 단칼에 죽고 싶어."
병원에서 언제나 삶과 죽음을 경험하는 마누엘라.
아기, 아이, 노인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삶을 마감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어느새 무뎌지기도 한 감정을 토로한다.
"이 질문이 옳은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
그에게 질문을 머뭇거리는데, 마누엘라가 먼저 묻는다.
"죽음을 마주하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나는 멋쩍게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에 따라 달라. 아이가 죽을 때는 매우 슬퍼.
그렇지만, 때로 죽음 이전부터 받아들이는 죽음이 있잖아. 사는 삶이 아닌, 그냥 삶을 연명하며 괴로워하는 환자들 말이야.
죽음에 대해 혼란스러워도 그를 보내야 하는 때도 있다고 응당 생각하곤 해.
네가 죽음을 앞둔 환자라면, 넌 이전 삶과는 다른 사람이야. 넌 아프니까.
피부는 주글주글해지는 건 물론, 몸은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완전히 다른 너를 만들 거야."
그는 공백 이후에 덧붙인다.
"인생은 어려워(Life is difficult for living)."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린 캐머마일을 우려낸 찻잔을 움켜쥔다.
그는 지난해 어머니를 잃은 이야기를 꺼낸다.
"가족이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데,
너는 막을 수 없는 무언가 변화가 발생한다면 ····"
그는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을 보인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 힘들어."
소중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가슴을 얼마나 짓누르게 하는지 짐작만 한 채로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때로가 아니야. 언제나 어려운걸.
때때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당연한 거야.
그렇지만 네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건 우리의 운명이니까.
나는 종종 기도하곤 해.
'제발, 신이 있다면,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신이 있다면,
바꿀 수 있는 상황에는 용기를 주세요.'
라고 말이야. "
우리는 따뜻한 차를 움켜잡으며 미소를 짓는다.
마누엘라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그를 꼭 껴안으며 나는 말한다.
"마누엘라. 너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야."
마누엘라는 울음을 참은 채 나직이 말한다.
"나는 노력 중이야.
내게 남은 삶을 살려고 노력 중이야.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고,
밖으로 나가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자신의 아픔을 보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눈물 흘리며 아픔을 토로한 뒤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는 그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어린아이의 미소로 소중한 이의 죽음 받아들이는 그.
사랑스러운 마누엘라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손을 꼬옥 잡으며 말할 뿐이다.
"너는 강한 사람이야."
병원에서 언제나 죽음을 마주하지만,
가족의 죽음을 마주하는 건 그에게 온전히 다른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누구든지 언제나 준비해야 하고,
누구든지 언제나 마주해야 하는 일이다.
"데이지, 이 말을 해주고 싶어.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질 때,
그들을 보내줘.(Let them go.)"
우린 서로 따뜻한 차가 가져다주는 따뜻함에
불면증을 완화해 주는 캐머마일 효능 때문일까,
노곤노곤해진 우리는 졸린 눈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마누엘라, 가톨릭환경에서 자랐다고 했잖아,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어?"
"천국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나는 이 삶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나는 죽게 된다면
나의 엄마, 할머니와 다시 만나고 싶어."
"나는 여러 종교를 알아가는 걸 좋아해.
그중에서 불교 교리 중 환생을 믿어.
상대방이 죽게 된다면 난 언제나 믿어.
그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될 거란 걸."
사후세계에서 소중한 이와 다시 만나 포옹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상상이 가져다준 감정적 동요에 그는 다시 눈물을 보인다.
조그맣게 눈물을 닦는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가 삶을 사는 이유는 모든 순간을 즐기고, 행복하기 위해서지.
행복해지기 위한 여러 가지가 있지.
먹을 것들, 여행할 것들 등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며 살고 싶어.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마누엘라는 이어 말한다.
"데이지,
지금 이 순간을 살아. (Live the moment)
단순한 것들을 즐기려고 노력해. (Try to enjoy the simple thing)"
푼타 아레나스를 산책하며 바라본 길 위의 캐머마일을 떠올린다.
데이지와의 식물인 캐머마일을 우려낸 따뜻한 차를 움켜쥔다.
마누엘라가 어머니에게서 받았다는 캐머마일 차가
완전히 비워져 시간이 11시를 가리켜서야 우린 잠자리에 들어간다.
마누엘라의 커튼 사이로 보이는 검정 밤하늘을 바라본다.
밤하늘은 푼타 아레나스의 바다 같다.
짙은 남색으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바다.
진솔한 바다의 모습은 편안하고 위안을 준다.
오늘 나눈 대화, 지난 모든 순간이 지긋이 내 머릿속을 스쳐가게 둔다.
밤하늘을 뚫고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빈다.
우리 모두가 죽음에 초연해지고,
현재의 삶을 즐기게 해 주세요.
데이지 (신예진)
yejin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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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