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만난 윤석호

by 여행가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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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타아레나스에서

날아다니는 갈매기,

차가운 파도,

매섭진 않지만,

바람과 춤추는 파도에 흠뻑 빠졌다.


아름답다.


하늘을 채운 회오리 같은 구름의 모양이 끝자락에,

내가 땅 끝에 있다는 걸 알린다.


우수아이아의 하늘처럼

푼타 아레나스 구름들이 회오리친다.

동시에 굉장히 잔잔하다.



곳곳에 캐머마일과 민들레, 데이지가 피어있다.

마을 곳곳에 꽃들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구나.



한참 푼타아레나스 순간을 음미하다가

칠레 라면집을 찾는다.



20240123_150240.jpg?type=w773 한국인에게 알려진 칠레 끝 라면 식당

"배 안 고파?"


"메뉴판을 볼 수 있을까요?"


"메뉴가 어디 있어. 라면이랑 김밥뿐이지."


"그럼 라면이랑 김밥 주세요(웃음)"


본인을 '호'라고 소개하는 가게 주인은

퉁명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정치 이야기로 서문을 여는 그에게 나는 말한다.


"동의해요.

저도 중앙아시아 여행자를 만났는데,

그곳에서는 푸틴이 옳은 사람인 것이 충격이라 말하더군요.

한국에서 푸틴은 독재자로 묘사되곤 하잖아요.


미국식 사고를 고수하면서

언제나 내가 주장할 수 없다고 깨달았어요."


그는 거침없이 답한다.


"미디어로 인해 숨겨진 것을 깨달아야 해.

너는 겉에서만 돌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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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라면 가게에서 먹은 라면


우리의 대화를 배경으로

호가 재생한 90년대 팝송 리스트가 흘러나온다.

'Let it be' 노래가 울려 퍼지며

칠레에서 라면을 먹는 이 순간.


소중하다.


나는 라면 국물을 한입 마신 뒤,

대뜸 호에게 말한다.


"선생님 삶에 대해 들려주세요!"



"허 참, 그런 걸 질문해!?"


그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면서

줄곧 자기 이야기를 피해 오면서도

조금씩 내게 온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한국은 내가 사랑하는 내 조국이지.

예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었어.


그렇지만 지금은 실망을 많이 해서 돌아가지 않기로 했어."



라면 가게에 매일 찾아오는 칠레 손님은

능숙하게 호에게 인사하며 의자에 앉는다.

호는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

그를 위해 라면을 만든다.



"그래도, 조국은 조국이지.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미래의 꿈나무들인데,

여기 있는 젊은이들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도 좋은 말을 해줘야지. "



손님에게 라면을 갖다 준 뒤,

그는 학창 시절의 세세한 이야기를 하며

우수에 젖은 듯한 표정을 보인다.



"80년대로 돌아가서, 가만 보자,

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살았어.

멋진 연애도 했지."


칠레 손님은 능숙하게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는다.


"예쁘고 밝은 친구들과,

진실한 사랑을 했었어."



그는 아련에 젖으며

자신이 삶에서 진실로,

뜨겁게 사랑했던 순간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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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세 번 정도 빠졌지.

세 번 다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어.

내가 놓친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헤어졌지."



"우와 사랑 이야기! 들려주세요!"



"첫 번째는 내가 고등학교 때였지.

한국 전쟁 당시,

서울 사람들이 대구로 피난했을 때,

나도 대구에서 태어났지.


피난민 마을에서 한 달 차이로

건너편 텐트에서 똑같이 태어난 이가 나의 첫사랑이었어.

이후에 상경해서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 나오고.."


식당을 찾는 손님으로 대화가 끊기면서도

나는 그에게 쫄래쫄래 질문한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라며 나를 다그치듯 하면서도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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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 날,

첫사랑이 자기소개하면서 일어나던 그 순간.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해."


그는 첫사랑 이야기를 하며

처음 만난 순간,

첫 번째 데이트 장소,

상대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의 장소와

그때의 분위기, 했던 대화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입을 맞추면서도 무슨 일이 생길까

손을 잡지 못했던 순간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순수하던 그 당시의 순간을 회고한다.


그는 칠레에서 라면을 끓이며 살아가는 할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할 때에는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간직한다.



"그러나, 상대는 미국 이민을 떠났어.

이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뻗었지.

버티기 힘들어서 결국 해병대에 갔다 왔어."


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기분이다.

강렬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


그 순간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묘사하며

말하면서 다시금 추억 속으로 빠진 그의 모습을 본다.



"두 번째 사랑도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었지..."



그는 몇십 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녀와 처음 눈이 마주친 17살의 순간부터, 마지막 3번째 사랑까지.

뜨겁고도 찬란했다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랑 모두

미국 이민으로 인해 이별을 맞았어."


"또 미국!

또 미국! (웃음)"


"내 주위의 좋은 여자들은 다 미국으로 가는구나.

안 되겠다. 나도 미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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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찬란한 삶을 살았다고 했잖아요,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뭐예요?"


그는 오랫동안 생각한 뒤 말한다.



"많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게 다 된다는 법은 없어."



"그래도 그걸 하려고 시도했거나,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후회를 하지 않죠."


"그렇지."



"저도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래서 다른 이들의 삶을 통해 배움을 얻죠."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묻는다.



"선생님은 삶을 사는 이유가 뭐예요?"



호는 코웃음을 친 뒤에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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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자식들이 있잖아.
새로운 생명을 만들었다면, 생명에 대한 의무감이 있으니,
오랫동안 자식들 곁에 있어줘야지.

그래서 내가 건강하게 사려는 거고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거야.

내가 건강해야지 애들 곁을
오랫동안 지켜줄 수 있잖아. 오랫동안 ….

나이 들어서도 사람들 만나면서,
일을 하는 것도 내 건강을 위해서야.


"너무 아름다워요!"


그는 이어 말한다.


"너희들이 하는 행동거지가 먼 훗날, 고대로 돌아와.

부모가 바라지 않아도,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를 해야 해.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과 영혼을 줬잖니.

그 이상 해줄게 뭐가 있겠니.

자식도 그걸 자각하고, 이해해야 하지.


부모도,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걸 다해야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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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그는 조언한다.



"당당하게 살아.

없어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

머리를 들고 살아.

기죽지 말고"


돈이 없는 건 불편한 것뿐이며 부끄러운 게 아니라며

사람은 항상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며

그는 구수한 욕을 덧붙인다.


"이 새끼야,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샹!

너도 앞으로 여행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는 당당하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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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야기와

식당에 울려 퍼지는 60년대 팝송을 들으니

괜스레 울컥함이 든다.


먼 곳 칠레에서 지내면서,

한국에서의 찬란했던 시절의

세세한 순간까지 다 기억하는 호 선생님.


나도 훗날 외국에서 살게 되면,

이렇게 과거를 추억할까?



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하고,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본다.




"너는 꼭 외국에 나가서 살아.

더 큰 세계를 꿈꾸란 말이야."



버킷리스트인 칠레 끝에서 라면을 먹는 이 순간,

그가 내게 공유한 그의 지난 삶과

그가 내게 보여준 우수에 젖은 눈빛과

그가 내게 들려준 90년대 팝송이

참으로 감사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데이지 (신예진)

yejin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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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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