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산티아고에서 만난 크리스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지속된 피노체트 독재 정권 동안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수많은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피노체트 정권 동안 발생한 정치적 억압, 고문과 실종의 자료를 담은
칠레 기억과 인권 박물관을 찾는다.
생생한 증언과 사진과 영상을 보면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한국 근현대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1980년 중반부터 활발히 일어난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1988년 국민투표가 이루어지고 1990년 민주 정부가 수립된 칠레.
실제 칠레와 한국은 1980년대 즈음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을 겪었다.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해 온 지난 이들의 피와 땀이
국경을 불문하고 내게 뜨겁게 느껴진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카우치 서핑을 통해 만나기로 한 크리스도 같은 박물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린 폐장시간에 맞추어 박물관 앞에서 인사를 나눈다.
작은 체구이지만, 동글동글하고 쾌활한 성격의 크리스는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자기의 삶을 들려준다.
남극만 다녀오면 모든 국가를 다녀왔다는 그의 삶은 흥미로운 경험으로 가득 차 홀린 듯이 나를 빠지게 한다.
식당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크리스의 제안으로 잠시 스타벅스에 들린다.
딱히 마실 생각이 없기에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나에게
그는 내 음료도 함께 들고 나온다.
"헉 고마워"
"데이지, 지금 내가 너를 사주는 게 아니야. 너는 이걸 공짜로 얻어먹은 게 아니라, 다음에 네가 주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때 지금 받은 걸 돌려줘야 해."
그가 건넨 달달한 음료 덕분에
산티아고를 기습하는 무더위는 이내 시원한 거리로 변한다.
그가 건네는 음료수 한 잔은 내게
열린 마음과 관대로 서로에게 선행을 베푸는 세상을 알려준다.
시원하게 들이켜는 음료에도
크리스의 말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산티아고 거리를 걸으며 그는 우주를 공유한다.
학창 시절에 우등생이 아니었던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었다.
"미국 군인은 많은 돈을 못 번다고 말을 하지만,
너는 그걸 알아야 해. 우린 어느 곳에도 돈을 쓸 곳이 없는걸."
살 곳, 먹을 음식을 대주는 것에서 나아가 추가 봉급도 주는 군인 시절 동안 그는 여행을 가기도 하고, 펀드에 넣어 돈을 모으기도 했다.
"난 사람들에게 사기 치던 사람이었어
나에게서 신뢰도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지."
5년 동안의 군대 생활을 통해
그는 돈을 벌어 대학 준비를 했고,
군대에서 만난 훌륭한 이들에게 영향받아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변화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야.
모든 이가 애초에 좋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야.
나도 군대 생활을 하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가는 데 몇 년이 걸렸지."
"모두가 완벽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여전히 나는 좋은 이가 되려고도 노력하지.
그렇지만 솔직하게, 나는 지금 내 모습이 참 좋아.지금은 그들이 나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들은 나를 믿어."
종교적이지 않지만, 우주의 카르마를 믿는 우리는
서로가 믿는 가치관을 나누며 믿음을 확인한다.
"지금 삶의 방식을 채택하고 나서
행운이 매 순간 찾아오고 있어."
"맞아. 왜냐면 네가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
수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서 우린 어떻게 살을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다. 우리 대화는 '좋은 삶'으로 이어진다.
"좋은 삶이란 뭘까?"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함께 사는 삶이지. 모든 사회와 문화는 결국 협력하는 본능으로 이루어져.
우린 지금 역사의 한 지점에 있어. 서로를 경쟁적으로 바라보는 시대지만,
여전히 우린 과거 부족의 성질을 갖고 있지. 함께 적을 향해 뭉치고, 협력하는 본능 말이야."
인류학적 언어든, 생물학적 언어든, 함께 어울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
시대가 바뀌고 이용하는 도구가 달라져도 서로의 대화가 단절되고, 더 이상 남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에도
우리의 본능은 서로를 원하는 삶.
"맞아. 네가 무언가 친절을 베풀면, 그 친절은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잖아."
"그렇지. 만약 그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상대가 주는 웃음으로 이미 다 돌아온 거지. 너의 행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듯이 말이야."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존재가 되며 좋은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나와 매우 비슷하다는 걸 느낀다.
난 그의 말을 통해 내 생각을 확인하고,
내 말을 통해 그의 우주를 확인한다.
"크리스, 너의 모든 말에 공감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거야?"
"각 생각들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만들어지니까. 많은 이들이 나보고 창의적이라 말하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기존에 존재한 것들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붙이는 걸 잘하는 것뿐이지."
우리의 걸음은 아르마스 광장으로 이른다.
광장은 공연하는 이들,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
멍 때리러 온 노숙자들, 여행의 정취를 느끼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우린 산티아고에서 유명하다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간다.
크리스와 만난 이후로 나눈 우주가 놀랍도록 비슷하며
그가 경험한 이들이 흥미진진하여 달궈진 내 감정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분출된다.
"크리스!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너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매우 들뜬 마음으로 목소리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서로 신나 하면서 우린 대화를 계속 이어갔고,
나는 그가 가진 여러 에너지에
괜히 더욱 덩달아 신이 나 방언 터지듯
라디오는 공백을 놔두지 못한다.
나의 들뜬 흥분에 함께 웃으며 크리스는 답한다.
“이것이, 내가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야. 사람이지.”
“맞아. 나도 여행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해.
내가 한 국가의 여행을 마칠 때마다 항상 남아있는 건 사람이더라고."
“나의 모든 여행에서, 어떤 공간을 가게 되면 그 공간은 언제나 똑같아.
그렇지만, 그 공간을 함께한 사람은 언제나 달라지잖아. "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산타 루시아 언덕으로 향한다.
공원의 일몰을 보러 간 언덕은 잠겨있다.
그러나 우린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어떠한 장소가 아닌,
거리를 걸으며 서로에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입학한 교정에서 경영, 경제학을 전공한 이후
그는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내게 말한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회사의 노예가 되지 마.
나중에 대기업에 가서 일할 수도 있겠지. 거기서 많은 돈을 벌 거야. 그 말이 네가 오랫동안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야.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돈을 벌면 벌수록 그만큼 소비를 늘리기 때문이야.
내가 했던 최고의 선택 중 하나는 내가 43살이었을 때, 내 아파트 대금을 다 갚았다는 거야.
혹자는 더 많은 돈으로 더 큰 집을 사겠지. 그들은 회사를 위해서 일하도록 강요받을 것일 테고.
그렇지만 중요한 건,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야.
나도 오랫동안 매우 열심히 일하며 지내왔어. 그렇지만, 너는 너에게 뭐가 더 중요한지 알아야 해. "
그와 대화하며 높아진 나의 목소리 성조에 나도 크리스와의 온도가 맞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나조차도 이 대화를 즐기고 행복해함을 느낀다.
전혀 다른 나이의 우린 삶에 대한 완전히 같은 열정으로
서로의 열정을 확인하고, 함께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크리스는 이어 말한다.
"사회는 점점 더 로봇이나 기계 같아. 기계가 가치가 있으려면 스스로를 깨달아야 하지.
너는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시간이 필요해.
모두가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지. 그들 자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각자의 것을 찾아야 해.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발견했다면, 너는 그걸 해야 하는 거야."
산티아고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나를 위해
저녁 배꼽 시간을 맞아 우린 칠레 음식점에 앉는다.
길거리에 펼쳐진 연두색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저녁 시간의 공기를 가득 채운다.
"나는 항상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해.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챙기고 있지.
나는 세상이 날 기억해 주길 바라는 듯 자기중심적이기 않아.
나는 나를 기념할 기념비가 필요하지 않아.
세상은 어느 순간에 잊히기 마련이야."
아코디언 소리를 중점으로 라틴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와의 대화는 49살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에 대해 열정 가득한 젊은이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나이가 들며 대게 삶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는 순간을 봐온 나는 그에게 여전히 풍기는 젊은 열정의 비밀을 묻는다.
"많은 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생일을 축하하지 않지.
본인이 나이 드는 걸 반가워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감사해.
나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위험한 짓 하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그는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등 모험스러운 '위험한 짓 프로젝트'의 영상을 보여주며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동시에 일 년에 최소 두 개의 멋진 일 하기 프로젝트도 말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이 낭비되듯이 지나가는 걸 싫어하기에 늙는 걸 싫어해.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멋진 일을 하려고 노력해. 가령 자선을 베푸는 등의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 말이야."
반 백을 앞둔 나이에도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크리스는 여전히 개구쟁이 소년 같은 웃음으로 젊은 삶을 살아간다. 그의 미소를 보며 깨닫는다. 생각이 함께 늙으면서도 언제나 젊게 살아갈 수 있구나.
"정말 멋진 생각이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인드로 늙고 싶어."
주문한 음식이 나오며 살사, 모조, 칠레 등
각양각색 소스가 함께 식탁에 놓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오늘 하루의 소회를 풀며
백색소음의 악단을 이룬다.
나도 크리스와 함께 악단을 이루어 백색소음에 동참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지금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뭔데?"
"되게 좋은 질문이야. 건강이 절대적으로 물론 중요하겠지. 네가 바꾸지 못하는 것 중 하나이니까.
그렇지만, 지금 당장이라면 경험이지.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그는 죽음에 대해 말하며
군인으로 일하며 겪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 말한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 과정에서 발생한 내전. 보스니 계(이슬람교)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계(가톨릭) 등은 민족 갈등과 정치적 분쟁을 배경으로 얽힌 갈등이 발발되어 촉발되었다. 이 내전으로 보스니아는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렸다.
_KIDA 세계 분쟁 데이터 베이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어느 순간에서도 어디서나 제노사이드가 있어.
보스니아 전쟁이 발생하고 나는 7달 동안 파병이 되었지. 매우 참혹한 시기였어."
사람들은 푸른 공장(blue factory) 죽은 시체를 쌓아 올렸다.
시체를 위한 컨테이너가 없어서 공장에 전부 집어넣은 것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극적인 냄새를 풍긴 채
보스니아 모든 거리의 집은 지붕에 없거나,
집 전체가 날아가 터전만 남아있었다.
"보스니아 현장에 가기 전에 4일 동안 진행되는 훈련에 참가했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날, 나는 이제껏 울어본 적 없는 정도로 통곡을 했어. 45분 동안 울고 또 울었지.
통곡의 45분이 끝나고 눈물을 닦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느낀 감정을 받았어. 나는 완전히 달라졌어. 내 안의 무언가 부서진 거야. (Something broken here.)"
그가 훈련하며 마주한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 안에 부서진 무언가는 죽음에 초연한 마음일까.
"대부분 군인들은 그 안이 부서질 거야. 무언가 내 안이 부서지지 않다면, 그 군인은 미치게 될 거니까."
처참한 전쟁 현장에서 죽음에 무뎌져야지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있기 때문일까.
45분간의 눈물 이후 달라진 크리스의 감정을 손톱만큼도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무언가 부서진 이후의 크리스를 그저 바라보며 그 감정을 조용히 헤아릴 뿐이다.
"나는 그 이후로 죽음이 두렵지 않아. 그렇지만, 난 내가 죽기 전에 경험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 나에게 당장 중요한 건 새로운 경험이거든."
크리스는 어릴 적부터 여러 곳을 여행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새로운 경험을 찾고 삶에 대한 의욕으로 가득 찬다.
여행하면서 만난 이들은 대게
'여러 경험을 했기에 이제는 지겹다,; 혹은
'앞으로는 한 곳에 머물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크리스는 다르게 말한다.
"그게 나의 열정이니까."
"어떻게 지금까지도
삶에 대한 동기가 많고
무언가를 계속해나갈 수 있는 거야?"
"매우 좋은 질문이다. 그렇지만, 나도 모르겠어.
많은 사람들은 나의 여행을 듣고 말하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도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나도 2003년 가지 똑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매번 일만 하면서 지냈지. 여자친구도 없이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어."
그의 숨겨진 삶을 들으며
공감으로 연신 끄덕인다.
"우린 모두 무작위야. 우리만의 의미를 가져야 하지. 종교의 힘이든, 다른 것의 힘이든, 우린 우리 만의 이유를 찾아야 해."
내 삶의 이유는 경험이야.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의 행복이지.
그와 나눈 우주를 통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삶을 탐구하고 도전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그가 보여준 삶의 이유를 통해 깨닫는다. 어떠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든 우리 삶의 중심 가치는 공통되는구나. 내 주위의 행복, 새로운 경험을 통한 확장, 관계를 통한 행복. 크리스는 내게 답한다.
"우린 모두 인간이니까."
애석하게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어느덧 깜깜해진 밤하늘이 알려준다.
나이가 들어 열정을 잃은, 편안하고 보수적이며 안정적 삶을 원하는 이들을 쭉 보아온 나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알려주기 때문일까. 무수한 경험 속에서도 여전히 경험을 갈구하는 그의 모습이 좋다.
삶에 대해, 새로운 경험에 대해 늙어서도 갈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 내게 알 수 없는 미소를 안긴다.
그와 보낸 마지막 밤은 정이 붙지 않던 산티아고의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헤어지며 그는 내게 말한다.
"이제 넌 너의 길을 가고, 나도 나의 길을 가겠지.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사이에 지금 이 순간이 간질 될 거란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야."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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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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