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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Jul 27. 2022

도망의 재정의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힘들 때, 도망가고 싶을 때, 대전에서 반수를 준비하다가 포항으로 도망갔다. 피아노 의자가 아닌 소파에 앉고 싶었고 악보나 비문학이 아닌 산문집을 읽고 싶었다. 대전에서 짐을 싸서 포항으로 갔다. 누워서 애인과 함께 음악을 들었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나에게 꼭 필요한 곡이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는 곡이었는데 유독 그날따라 눈물이 났다.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옆에는 애인이 있고, 엄마는 대전에서 나를 돌봐주고, 나를 떠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나는 괜스레 겁이 났다. 못난 대학에 다닌다는 열등감에 잡아먹힌 나는 내가 훗날 졸업해서도 못난 사람일까 봐, 그래서 애인도 엄마도 나를 떠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면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무대 위에서 겁먹고 울었던 그날을 재현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열심히도 연습했다.


 공황장애가 터져서 목욕하다 쓰러진 적이 있다. 내가 진작에 정신과에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숨을 못 쉬는 와중에, 의식을 잃어 할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쓰러진 걸 보고도 아무도 119를 불러주지 않았다. 3분간 그렇게 정신을 잃었을까, 다시 호흡하고 정신 차리고 나서야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 119를 불렀다.

 “저기요, 제가, 숨이, 숨이 안 쉬어져요.”

 “신고자분 진정하시고 천천히 호흡하세요. 금방 갈게요.”

 그 말을 듣고 바닥에 누워서 숨을 골랐다. 공포가 엄습했다. 내가 망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는데, 나는 고3인데. 이대로 망가진 채로 무대 위에 설 수는 없었다.


 응급실에 도착해 내가 들은 말은 신체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이었다. 곧이어 정신과 의사가 왔다. 이것저것 묻더니, 공황장애 같다며 집 근처 정신과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 말에 할아버지는 이제야 정신과에 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아무도 나와 같이 병원을 가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 받은 비상약만이 내 동아줄이 되었다.


 고3, 처음으로 실기를 치던 날. 공황 징조가 느껴졌다. 의사는 비상약을 먹으면 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무대 위에서 약을 먹을 수는 없었다. 약을 쥔 손을 펼쳐 다시 약을 놓았다. 그대로 무대 위 대기석에 앉았고, 앞에 있는 사람의 곡을 듣다가 눈물이 흘렀다.

 ‘내가 진짜 시험을 치러 왔구나.’

 현장감이 느껴졌다. 무대에 잡아먹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아이의 무대를 망칠 수도 없었으니까. 그대로 시험을 망치고 나와서는 울었다.

 “나 다시는 피아노 안 칠 거야!”

 “이게 뭐야, 겨우 3분을 위해서 몇 년을 노력했는데!”

 “겨우 1초 못 참아서 이렇게 망치는 건 말도 안 돼!”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나를 주목하는 무대 위에서 나는 건반 하나도 건들 수 없었다.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던 날이었다.


 눈이 많이도 내린 날이었다. 눈에 파묻혀 죽고 싶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다시 그 무대 위 앉았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못한 나는 무대 밖에서 울지도 못하고 애매모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결과를 받은 날, 나는 애매한 숫자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마지막 날. 결국 내 꼬리표에는 예비 8번이라는 글자만 적혀 있었다.

 ‘그래, 그래도 무대 위에서 안 운 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를 달랬다.


 학교에 복학하니 연을 끊었던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생이 회사에 기간제로 일한다는 말이었다. 돈 들여 레슨받고 연습하고 입히고 먹이고 재운 나는 결국 지망하던 대학을 떨어져 학비로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데, 동생은 돈을 벌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뭐라도 성과를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고. 갑작스러운 연락을 거절하는 게 맞았지만, 나는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 회사 대표님한테서도 연락이 왔다. 진지하게 우리 회사에서 일해보자고. 당연히 응했고, 경영지원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월급을 받다니, 작은 회사지만 자부심이 들었다.


 그 자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입사 동기는 나와 부서가 달랐는데 어떤 인사 채용 시스템을 가져오더니 이걸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검토해보고 말해주겠다 했다. 검토해보고 시기상조인 것 같아서 그대로 말해주니 그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어제 깔짝거리고서 오늘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난 준비 다 했는데?”

 “왜 일을 두 번 하게 만들어요?”

 억울했다. 내가 도와달라고 한 일도 아니었고 나는 분명 검토하고 말해준다고 했는데 왜 이 사람은 화를 내는 걸까. 지금까지 무수한 지적은 들어봤지만 이렇게 화를 내며 혼내는 건 처음이었다. 회사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던 내가 처음으로 안 좋은 말을 들어서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도 화내고 싶은데 못 내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한심하게 일도 못 하고 옥상에서 울기만 했다. 그런 나를 사무실에서 발견한 이사님은 같이 담배 피자며 나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데이나, 요즘 힘들어요? 뭐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내가 민폐 덩어리 같아요.”

 “데이나가 무서워하는 사람은 데이나 안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이사님은 내가 좀 쉬다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울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사님은 회사 스피커로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들려주셨다. 그러더니 나를 보면서 

 “데이나 이 노래 좋아한다고 했죠? 이 가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어디인 것 같아요?”라고 물으셨다. 모른다고 하자 정답이 흘러나왔다.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이사님은 가만히 나를 보며 말했다. 잘 쉬다 오라고. 그래서 씩씩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때로는 붙잡는 것보다 도망쳐서 쉬는 게 도움 때가 있다. 도망을 쳐도 아주 도망치지만 않으면 도망은 비겁한 게 아니다. 다시 돌아올 용기를 만들러 가는 것, 나는 그것을 도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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