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소재주의 혹은 오래된 실용주의
<캡틴 마블>을 가족들과 보고 왔다. 재밌었다. 여성의 날(3.8)에 전세계 개봉하면서 한국에서만 그 날을 피해 개봉한 것도 귀여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예전의 헐리웃 영화의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고전적이 헐리웃 영화가 유치한 소재주의였다면 캡틴 마블은 영리한 소재주의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용주의'(Pragmatism)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한국 영화는 유치한 소재주의를 넘지 못하니까)
주인공 캐럴 댄버스는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처럼 정체성의 혼란도 없고, <레지던트 이블>의 앨리스처럼 절박함도 없는 어정쩡한 영웅이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크리족 전사로서의 핸디캡을 오히려 풍부한 감정으로 극복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메트릭스>의 각성한 네오, 또는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한 카카로트처럼 이미 승부가 결정난 상황에서 적을 갖고 노는 방식은 느슨한 시나리오와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짜깁기한 느낌이었다. 극적 긴장이 떨어지니 영화 관람의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 <아바타>처럼 캡틴 마블도 컷들을 한줄에 나열하고 재미없는 부분을 날려버리는 'fun or not' 방식의 편집 냄새가 짙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원죄와 같은 습관인데 짜깁기로 가치를 만들어낸다. 여성이라는 메시지는 그저 잘게 먹기 좋게 요리된 통조림처럼 보였다.
세계 여성의 날에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 이 작품이 개봉된 것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소비한다는 또 하나의 근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통제되어야 했던 추억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며 성취를 보여주고자 하지만 그건 그저 먹히는 감동에 불과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여성적인 상징과 페미니즘적 성격에 환호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할 것이다. 영화 자본의 입장에서 사회적 논쟁이 되는 이슈를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금기하는 일이다. 하지만 마블 스튜디오는 논쟁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페미니즘이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과 무관해 보인다.
미국의 실용주의적 전통에 대한 유럽적 사고의 반론은 꽤 오랜 주제다. 하지만 캡틴 마블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서는 '톰슨'이라는 미국 엔지니어의 실용주의에 대해서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마블의 다른 영화를 봐야겠지만, 이 비판에서 자유로운 미국 영화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작위적인 느낌이 나는 장면에 감동할 마음은 없다.
“그것은 결코 적은 일이 아닙니다. 소위 엔지니어가 말하는 연속적인 진보라는 당신의 표상은 우리 과학에서 모든 힘을, 다시 말해서 모든 엄정성을 빼앗고 맙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정밀과학을 운운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만약 사람들이 물리학을 이와 같은 순수한 실용주의적 방법으로 추구해 나가려고 했다면 그들은 그때그때 실험적으로 잘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부분영역(部分領域)만을 문제 삼고, 또 거기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근사식(近似式)을 통해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 표현이 지나치게 부정확하다고 생각되면 수정항(修正項)을 추가해서 보다 더 정확성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연관성 같은 것에 대한 물음은 도대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물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뉴턴의 역학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보다 뛰어나게 한 아주 단순한 연관성조차 도달할 가능성을 전혀 갖질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학문의 가장 중요한 진리규준, 즉 자연법칙에서 항상 빛나고 있는 단순성이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