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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Apr 01. 2020

코로나19와 세계 방어시스템

『시민권과 자본주의』에서 지구 시민들이 원팀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다

코로나19에 대한 세계 방어시스템이 안 되는 까닭


20세기를 민족국가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민족국가의 시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가 20세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 안에 사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동등한 시민이 되는 '지구시민의 시대'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코로나19에 대한 세계 방어시스템이 실시간 가동되며 적절히 반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처럼 많은 사망자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국가의 일원인 우리들은 지구 공동체의 지구시민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구시민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다운그레이드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국가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은 지구 공동체에서는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누구나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전 세계가 원팀으로 싸우는 것이 각자도생하는 것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세계 방어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지구 원팀에 대한 힌트는 근대 민족국가에 있다. 삼국시대 이전과 삼국시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수많은 나라를 하나의 나라, 원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커다란 힘이 필요하다. 실제로 힘이 강력했던 세 개의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을 형성했고 이 중 가장 강력했던 신라가 통일을 이뤘다. 중국 역시 강력했던 7개의 국가가 전국시대를 열었고 서북쪽의 진나라가 통일을 이뤘다. 엄청난 힘은 중앙집권시스템을 운영하고 전 국민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유럽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지 못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전 유럽을 하나로 통일할 만한 역량을 갖춘 하나의 나라가 탄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유럽 통일을 꿈꾼 나라도 많았고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지구 시민이 소속된 지구 원팀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강력한 힘이 전제를 이뤄야 한다. 강력한 힘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코로나19 같은 재난 또는 테러, 전쟁은 강력한 권력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전 세계의 최고권력자 지지율을 보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사상 최고이며,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이 유력하다. 심지어 사학 비리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오른 것은 코로나19라는 세계적인 재난이 권력자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 상황은 항구적인 권력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결국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서 전 세계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야 지구 원팀이 가능하다.




투쟁 에너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절대권력으로 진화할 수 있다.


브라이언 터너의 『시민권과 자본주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네 개의 파고를 언급했던 부분이다.

급진적 시민권은 계급투쟁, 전쟁, 이민, 그리고 평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근대화과정에서 이 네 가지 요소들이 모두 나타나는 곳에서는, 시민권은 형식적이고 방어적이기보다는 실질적이고 팽창적이다.


전근대 시대 일반인들은 신민(臣民, subject)였다. 왕 또는 영주의 물건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투쟁을 통해서 그들은 시민권을 쟁취했다. 시민은 물건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일정한 권한이 있는 사람이다. 회사를 상상해 보자. 만약 전 직원이 회사의 주주라면 직원들은 회사의 성장을 위해 노력할 동기가 생긴다. 회사가 성장할수록 지분의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주인이 한 사람이고 사원들은 월급만 받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면 회사를 내 것처럼 아낄 수 있을까? 결국 커다란 권력이 생긴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충성심 또는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전 세계의 사람들이 지구 시민권이 생긴다면 그들은 지구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지구를 하나로 만드는 커다란 힘을 형성한다.


계급투쟁이 어떻게 커다란 힘을 만드는지 브라이언 터너는 '공장법'의 예를 든다. 노동자의 투쟁에 아동,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논쟁이 결합되면서 공장주와 정치인들을 압박해 제도 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 공장법이 제정되기 전에 지독한 아동노동에 시달렸던 영국의 어린이들은 의무 보육과 의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투쟁이 많은 사람들을 결합시킬 수 있고 힘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이다.


물론 투쟁은 다른 투쟁을 배제하기도 한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건 1789년인데 프랑스 여성의 투표권이 생긴 것은 1944년이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지 150년도 넘어서의 일이고 우리나라보다 단지 3년이 앞섰을 뿐이다.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주체가 남성이었으며 여성의 권리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페미니스트 운동과 여성참정권 운동으로 조직된 여성들은 민주적 원칙들과 모순된 상황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였고 이 결과 페미니즘이 발달할 수 있었다.


여성 시민권의 성장은 각성된 남성 정치인들이 이타주의적인 입법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사회가 어디 그런 식으로 발전한 적이 있었나? 전쟁이라는 조건과 중공업분야의 여성취업 증가의 결과였다. 낭만적 사랑과 육아 개념 후기 자본주의의 재산소유권 성격이 변화하면서 여성의 공적 지위는 개선되었고 피임기구의 발달 또한 여성으로 하여금 공적ㆍ사적 생활에 대해 통제권을 갖게 했다. 19세기 결혼소송법과 20세기 이혼절차의 변화는 남녀간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법이 제정되기 전에 여성들은 이혼과 함께 법적 지위가 상실되었다. 결혼과 함께 여성의 법적 인격체가 남편의 인격체 속으로 귀속돼 버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여성의 이혼은 자유였지만 이혼한 여성이 낳은 아들에게는 고급 공무원이 될 수 있는 '문과(文科)' 시험 자격이 박탈당했다. 오랜 투쟁의 결과 여성들이 권한, 즉 힘을 얻게 되었다.


『시민권과 자본주의』를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투쟁, 투쟁, 투쟁... 투쟁의 연속이라니 인생이 너무 지치고 피곤할 것 같다. 투쟁을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해서 좋은 것을 얻을 수는 없을까? 만약 이런 욕구가 생긴다면 한 나라를 떠올리면 된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권력자들이 제대로 폭망한 적이 없다. 아베가 쫓겨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아베가 쫓겨나더라도 100% 자민당의 정치인이 수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투쟁 없이 어느 한 쪽만 권력을 오랫동안 독점한 결과 오늘날의 일본이 어떻게 되었나? 차라리 조금 불편해도 촛불 들 때는 들고 주변의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서 투쟁 에너지를 적립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나는 '투쟁 없는 지구 원팀'을 단념하기로 했다. 이번 생은 피곤하겠지만 투쟁을 멈출 수 없다.


시민권의 발달은 절대정신과 같은 어떤 보편주의적 본질이 진화론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와 시민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발전과 사회집단들 간에 빚어지는 모든 형태의 특별한 갈등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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