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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Feb 14. 2021

고레이다 히로카즈, 고통에서 감수성으로

고레이다 히로카즈 영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가족>

이번 설 명절 연휴 때 고레이다 히로카즈 영화를 몇 편 봤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부터 시작된 가족 담론이 <아무도 모른다>와 <어느 가족>으로 확장된다. 고레이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테마 자체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전통의 관념들을 전복시키는 공략을 집요하게 이어 간다.



고통을 감수성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배웠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고통이 있지만 접수가 제대로 안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고통이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마치 안개처럼 좀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도 고통의 장기다.

 

<아무도 모른다>는 실제 아동 방임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어느 가족>도 죽은 자의 보험료를 부정 수급해 사회적 지탄을 받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통과 감수성이 명확히 보이는 영화다.


<어느 가족>에 나오는 쥬리라는 여자 어린이를 보면서 정인이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분노하고 잊는다. 그리고 정인이 사건과 유사한 사건은 또 일어난다. 우리는 마치 조건 반사처럼 또 분노한다. 그리고 또 잊고 똑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고통은 있지만 고통을 접수할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에서부터 뜯어고쳐야 하는지 돌이키는 것에서부터 고통의 접수가 시작되고, 일단 접수된 고통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헛발질을 하든 답변을 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마치 공무원과 민원 처리의 숙명 같은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를 본 관객들은 부모의 파렴치한 행동에 조건반사처럼 분노 버튼만 누르던 패턴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그 시간 동안 어떤 조건에 놓이고 어떻게 견뎌내는지, 아이들의 인격은 어떻게 왜곡되는지 차분히 살펴본다.


<어느 가족>을 본 관객들은 어떻게 학대를 반복적으로 받아온 어린 여자 아이가 누군가에게 정을 줄 수 있는지 헤아려볼 수 있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근원적인 질문인 '인간에게 희망은 있는가?'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학대를 당했다고 위험한 무기가 되어버릴 거라면 인간에게는 어떤 희망도 개선의 여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버리지 않기 위해서 고레이다 감독은 사건을 예술적인 눈으로 하나 하나 뜯어보고 펼쳐보이는 것이다.


죠 카이리(쇼타 시바타 역)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워 왔다던 레오 리오니의 <헤엄이>(Swimmy)에서 큰 물고기를 걱정하는 대목이 참 절묘하다. 큰물고기와 잔물고기떼의 대결 서사를 거부하듯, 사회적 잔물고기들이 생존하는 것, 기왕이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고레이다 감독의 예술 목표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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