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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Mar 08. 2021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망가진 까닭

청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로 본 중대재해법 난도질

예측된 중대재해법 난도질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해이면서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펴낸 1818년의 이듬해인 1819년 영국의 노동운동가이자 정치지도자였던 로버트 오원은 <공장법> 제정운동을 하면서 '암 걸릴 것 같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아동노동 연령 제한, 노동시간 제한 등의 주요 입법 사항이 누더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원은 법 제정 운동처럼 제도적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한계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대재해법이 난도질당했다고 몇몇 언론에서는 난리다. 5인 미만 사업장(전체 사업장의 32.1%, 전체 사업체의 79.8%)은 아예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고 안전관리 감독 의무를 소홀히 한 공무원 처벌 특혜규정과 발주처 공사기간 단축과 일터 괴롭힘 등 실제 노동자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제기되었던 조항이 삭제되었다. 2년이상 징역 또는 5천만원 이상 10억원 이하의 벌금은 슬그머니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고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이 와중에 '기업들을 감옥 위에 올려놓았다'며 입법 자체를 반대한 조선일보와 경영계의 정반대 목소리도 있어서 가관이다. 마치 연극을 하는 듯한 이 소란에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부화뇌동이다. 서늘한 이성과 따뜻한 심장으로 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 『경제학-철학 수고』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 책은 강유원 번역본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을 참조했으며 괄호 안에 표시된 숫자는 쪽수임.


영화의 첫장면은 숲에서 버려진 나뭇가지를 줍는 사람들이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노동자와 민중이 스스로를 깎아내렸기 때문에 경찰도 파리 목숨으로 본 것이다


중대재해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노동자들은 지금 어떤 상황인가?


마르크스는 먼저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먼저 노동자는"부를 많이 생산할수록 더욱 가난해지며, 상품을 더 많이 창조할수록 더 값싼 상품이 되는"(85) 기구한 존재다. 자본(또는 자본가)는 노동과 생산물 일체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바탕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칭기스칸의 몽고제국 같은 존재이다(59) 자신의 재산을 신성화하기 위해서 입법의 도움까지 받기 때문에(34) 노동자와 자본가는 지나치게 비대칭한 게임을 하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을 고용하는 것은 한없이 자유롭지만, 노동자는 항상 노동을 판매하도록 강요받는 처지다. (32) 노동자는 팔 것이 노동밖에 없으며 노동을 팔지 못하는 순간 굶어 죽을 위험에 시시각각 직면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돈을 지불하지만, 지불하는 돈이 손해가 난다면, 즉 "노동자의 상품 판매에서 노동임금으로 미리 지불한 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면"(35)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는 영원히 이득을 얻고, 노동자는 항상 제자리걸음이거나 굶어죽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자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 돈을 주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생산이 노동자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상품 생산의 규정에 맞게 인간을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비인간화된 존재로 생산하는 것이다.(107) 노동자의 위상은 자본가의 비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년 마르크스의 분석틀을 가지고 중대재해법을 살펴본다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은 비인간화된 존재로 취급받는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죽음은 '비용'이었다. 그런데 비용의 죽음에 대해서 자본가 자신이, 또는 감독기관의 공무원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혁명적인 발상일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들의 숱한 죽음은 '추상적인 죽음'이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가 아끼는 사람이 노동자로서 노동 현장에서 죽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영원히 '추상적인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확률은 0에 가깝다. 자본가가 노동자 지인과 친밀해진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마르크스가 볼 때 실존하지 않는 존재들,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소매치기, 사기꾼, 거지, 직업을 구하지 못한, 굶주린, 빈곤한, 범죄적인 노동인간은, 국민경제학에는 실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 즉 의사, 재판관, 무덤을 파는 사람, 거지 단속 경관 등의 눈에만 실존하는 형상들이거니와 이는 국민경제학 영역 바깥의 유령들이다.(106)


 

노동자들에게는 적들이 너무 많다


청년 마르크스는 중대재해법을 원하는 수준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이 노동자인 우리들 안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보았듯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마치 대학생과 유치원생의 씨름처럼 지나치게 비대칭하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비대칭을 보완하는 갖가지 장치를 두었겠지만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입법기관은 노동자보다는 자본가의 눈치를 더 본다. 게다가 자본가는 언론이라는 든든한 보디가드의 호위를 받고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또 한 명의 중대한 적을 강조했다. 바로 국민경제학자이다.


국민경제학자가 노동자의 활동을 모든 활동의 순수추상으로 만들듯이, 그는 노동자를 무감각하고 욕구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149)

국민경제학자는 자본가의 '입 속의 혀' 같은 존재로 노동자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국민경제학자의 설교에 설득된 노동자는 순한 양처럼 인간 이하의 생활과 치명적인 궁핍을 견디며 스스로 욕구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자의 '죽음의 논리'를 '생명의 논리'로 바꾸고 싶었다. 청년 시절 헤겔 철학에 흠뻑 빠져 헤겔리안이었던 마르크스는 헤겔이야말로 국민경제학의 두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결별하게 된다. 아일랜드 인의 룸펜 감자 이야기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잘 대변한다. 아일랜드인들은 먹는 욕구를 훼손당했다. 그들은 감자 중에서도 가장 나쁜 감자인 룸펜 감자를 먹는 것에 대한 욕구만 알고 있다. 룸펜 감자 하나조차도 감지덕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모든 공업 도시들에 '작은 아일랜드'가 점점 확산된다는 것이다. (148) 2021년의 대한민국에도 룸펜 감자 하나에 감지덕지하는 작은 아일랜드가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중대재해법을 막는 것은 자본가가 아니다. 국회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아니다. 국민경제학자들이 아니다. 룸펜 감자에 감사하고 룸펜 감자를 먹는 욕구만 알고 있는 우리, 노동자 자신이 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오랫 동안 받았던 세뇌로부터 깨어나 욕망하고 아픔을 느끼고 기분 나빠하고 활기를 얻는 사람으로서 서는 것이야말로 청년 마르크스가 원하던 바이며 『경제학-철학 수고』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마르크스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신의 소망을 적었다.


인간에 대한 - 그리고 자연에 대한 -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그대의 현실적ㆍ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181)


물질에 예속된 인간들의 시대를 자본가-노동자, 국민경제학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설명하려 한 청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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