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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May 15. 2020

레미제라블과 선생님의 사랑

왜 장발장은 인생역전했고 자베르는 자살에 이르렀을까?

한 번도 사람대접 받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


공부방을 할 때 상상할 수도 없는 학대와 폭력을 당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많이 아프기는 했지만 사랑은 듬뿍 받았다. 그 사랑의 혜택을 피부로 실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아이들 때문이다. "아빠한테 기절할 때까지 맞았어요."라는 말을 웃으면서 하는 아이, 단지 엄마와 놀고 싶었던 것뿐인데 너무나 오랫동안 놀아주지 못한 엄마를 증오하게 된 아이, 이혼한 데다가 바쁜 엄마의 일 때문에 매일 저녁을 편의점에서 때워야 했던 아이, 형에게 장난으로 매일 맞고 살았던 아이...


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나의 사랑이 전달될까? 심지어는 내가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진로에 손해가 난다고 제자들은 모이지 않았고 프랑스혁명의원을 지냈던 노인과의 논쟁을 보면 미리엘 주교의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미리엘을 더 사랑한다.


레 미제라블을 보면서 그것이 나의 짧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처럼 어릴 적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이 인색한 사랑에 시달린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사랑을 받고 엄청난 혼란에 시달렸지만 결국 일어섰다.


나도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한다면 참혹한 경험을 했던 아이도 조금씩 살아나게 할 수 있다. 부모에게 수시로 뺨을 맞는 아이가 있었다. 항상 유리창 난간을 바라보며 자살 암시를 주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레 미제라블>의 가르침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사랑을 주었다. 부모에게 뺨을 맞던 아이는 글을 잘 써서 독후감 대회에서 상도 받았고, 자살을 암시하던 아이는 밝게 웃는 아이로 변화하였다.


고통의 크기는 어쩌면 부수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 완전히 말살되지 않는 한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다는 것이다.



같은 사랑을 받은 자베르 경감은 왜 자살했을까?


미리엘 주교의 사랑은 장발장은 안 되는 건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정말 당황스러웠다. 같은 사랑을 받았는데 왜 자베르에게는 면역 반응을 일으켰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공자에게 들었다.


그럴 만한 자위에 있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일들이 존재한다(논어)


"미리엘>장발장", "장발장<자베르"라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컸던 것 아닐까? 뺨을 맞던 아이와 자살 암시를 했던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선생의 지위에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선생님의 사랑이라는 건 단지 지위만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장발장은 시장의 지위로서 자베르보다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물리적 지위보다 더 중요한 지위가 있다. 나는 덕망의 지위라고 부르고 싶다.


장발장은 미리엘이 단지 주교였기 때문에 감복한 것은 아니다. 존경할 만한 인품이 있었기에 인생이 바뀔 수 있었다. 자신을 모두 버리고 온전히 상대방이 될 때만 사랑은 강력한 힘으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은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선생님을 인생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삶은 축복이자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들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나의 사랑에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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