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다큐멘터리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보고 왔다. 좋은 영화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고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마음에 씨앗을 심어 놓은 것처럼. 처음에는 심심하고 밋밋한 느낌이었다. 김경만 감독은 조사원들과 생존자 면담에 동행하면서 개입을 최소화했다. 거의 0에 수렴하는 개입이었다. 다섯 명의 할머니가 주인공이었다. 여성 영화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서 생각이 계속 나아갔다. 뭔가 불필요한 것이 제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바로 제거된 것에 대한 이야기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무엇이 제거되었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 생존자 할머니 다섯 분의 이야기를 따라서 이어진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기뻐했던 모습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갇혀 있는 기간이 짧으면 석방 후 끌려가서 총살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 갇힌 것보다 갇힌 것이 낫고, 짧게 갇히는 것보다 길게 갇히는 것이 낫다. 집보다 감옥이 더 안전한 역설을 제주 4.3이라는 사건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제주4.3에 대한 재현 또는 작품화에서 과잉된 감정과 목소리, 해석이 불편했다. 특히 남성 생존자의 증언을 듣다 보면 시국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학살의 불가피성 등이 개진될 때가 많다. 사건에 대한 해석은 자유이지만, 해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해석을 해버린 상황에서 제주4.3을 생각하게 된 순간은 마치 내 생각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그것을 요새말로 "답정너"라고 할 것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답정너가 없다. 일체의 해석과 개입을 줄이고 생존자의 이야기에 충실하다. 그래서 사건이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커져야 한다.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큰 목소리로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상황논리, 국제정세, 정치, 이념 등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삶에 집중한다는 것은 제주4.3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세나 시국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람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는 데 성공하면 시국도 정치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이야기가 튼튼한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