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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Apr 16. 2017

샌님, 오웰에게 정치를 배우다

정치와 고전을 시작하며

두 명의 정치적 스승


나는 대학 시절부터 책만 읽던 샌님이었다.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한 선배는 경찰을 피해 도망다녔고, 나는 그 선배를 피해 도망다녔다. 그러던 내가 대학 졸업 후 언론 시민운동에 뛰어들었고, '투사'처럼 행동했다. 김수영 시인과 소설가 조지 오웰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군 전역하고 나서 얼마 후인 2007년부터 내리 4년 동안 언론운동을 했다. 김수영의 언론자유에 대한 생각이 영향을 미쳤다. 


1에도 언론자유요, 2에도 언론자유요, 3에도 언론자유다. 창작의 자유는 백퍼센트의 언론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테이지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김수영 산문전집』, 「창작자유 조건」


2007년 구독하던 신문의 사설을 통해서 '시사저널'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뛰어들었다. 모 대기업에 관한 비판기사를 사장이 무단으로 광고로 갈아치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해당 기사는 지면에 끝내 올라오지 못했고 기자들은 새로운 신문사를 차렸다. 그게 시사IN이다. 그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는 2010년까지 언론운동을 해야 했다. 


2007년부터 4년간 '샌님'의 태를 많이 벗었다. 2007년 4월 14일 심상기 회장의 집앞에서 시사모 회원으로서 릴레이 1인 시위(왼쪽), 2010년 3월 18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검찰을 비판하는 퍼포먼스. 



언론운동은 정치운동이다. 정치권력은 언론을 제1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사실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2007~2010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다. 팔다리가 끊기고 무색무취의 기사만 뱉어내는 영혼 없는 언론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언론자유의 정반대쪽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2010년 이후로 정치적이지 않은 글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국민적으로 '정치'의 중요성이 많이 부각되었지만 여전히 유아적인 이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교육을 어디서 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의 스승이다. 나는 조지 오웰을 사숙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


1937년 3월 우에스카의 아라곤 전선(뒷줄에서 제일 키 큰 사람이 조지 오웰, 그 아래 여성은 아내 아일린). ⓒ한겨레출판


조지 오웰을 롤모델로 삼는 까닭은 행동이 앞서고 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 반대로 한다. 1936년 2월 선거에서 스페인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승리하자 대지주, 자본가, 종교계, 군부 세력이 결탁해 그해 7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다. 전 세계의 공화주의자들이 참전했고 조지 오웰도 그 곳에 있었지만 충격적인 환멸감과 패배감을 안고 야반도주하고 만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사실과 직접 경험한 진실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에세이 모음집 『나는 왜 쓰는가』와 소설 『카탈루니아 찬가』에 담겨 있다. 


왜 정치와 고전인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정치하지 마세요"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왜곡된 편견으로 가득하며, 그것은 매우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나도 그 편견의 무리들 틈에서 '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나를 꺼내준 것은 고전이었다. 철학을 전공하며 틈틈이 철학 고전작품들을 읽을 때 모든 철학 분야에서 윤리학과 정치 철학이 가장 으뜸이라는 주장을 접했다. 정치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던 나에게 정치 철학의 최고 위상은 무척 낯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내 의구심을 말끔하게 정리해주었다.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善, agathon)이다. 이 점은 모든 학문과 기술의 으뜸인 정치(politike)에 특히 가장 많이 적용되는데, 정치의 선은 정의이며, 그것은 곧 공동의 이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왜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온갖 안 좋은 이미지와 혐오감으로 가득할까? 온갖 편견과 안 좋은 감정은 든든한 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의 문자 독점 현상과 비슷하다. 문자를 공유하기 시작하자 권력독점이 완화되었듯이, 정치를 이야기할수록 벽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고전'이라는 든든한 무기로 정치의 벽을 내리치려고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면 어떤가? 내가 '벽'을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이미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벽은 곧 무너지고, 한국 사회에서 어린 아이도 정치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한다. 20년 전 나는 청소년이었고, 30년 전에는 어린이였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다. 고전은 '현재'라는 시간 때문에 고전이 된 것이다. 당대에는 현실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현실 문제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건만 달라졌을 뿐이다. 고전의 저자들이 고민한 현실의 문제를 현대에 맞게 조금만 다듬으면 충분히 쓸만하다는 사실을 고전 공부를 통해서 알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는 날까지 정치와 고전에 대한 글들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것이 일단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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