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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Dec 19. 2017

읽는 독서 메모와 안 읽는 독서 메모

안 보면 후회하는 메모 독서의 디테일

파란 볼펜과 빨간 볼펜


대학 시절 메모지에 부지런히 책 내용을 베끼고 있는 걸 유심히 보고 있던 동기가 물었다.


너, 메모한 거 다시 읽니?


당시는 메모 독서 초기였기 때문에 호기롭게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난 동기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수없이 쌓여가는 '읽지 않는 메모'를 보면서 나는 '읽는 메모'를 만드는 방법을 따로 고민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이 책을 읽었지' 하는 기억만 빼고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게 된다. 만약 3초 안에 그 때의 느낌을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래의 사진은 빼곡히 베껴쓰기를 한 독서 메모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한번 살펴보시라.

그저 베끼기만 한 메모는 나중에 다시 읽을 때도 내용파악을 하기 어렵다. 왜 메모를 했는지도, 메모를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파란색 볼펜으로 인용문 베끼기를 했다. 한동안 파란색만을 부지런히 사용했다. 이런 습관은 최근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쓰면서 바뀌었다. 책을 쓰면서 점점 빨간색 볼펜의 비중을 늘렸다. 빨간색 볼펜은 독서를 하는 순간에는 번거롭다. 빨간 볼펜은 베낀 구절을 짧게 요약하거나 베낀 구절을 보고 생각난 것을 쓸 때 사용한다.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 또는 해석인 셈이다. 이렇게 적어둔 빨간 볼펜은 나중에 다시 읽기를 할 때 놀라운 효과를 준다.

빨간색 볼펜의 효과를 알고 나서부터는 메모를 생산할 때마다 빨간 볼펜으로 표시를 한다. 나중에는 빨간색 부분만 읽어도 읽을 당시 어떤 느낌이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빨간색 볼펜 표시를 부지런히 하고부터는 메모를 자주 읽게 되었다. 메모를 읽는 게 재밌기 때문이다. 메모에는 짧게 내용이 적혀 있고, 나의 느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대견함을 느낀다. 마치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와 조우하는 느낌이랄까?



빨간 볼펜은 어떤 마술을 부린 걸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독서 메모를 펼쳐 봤다. 2017년 7월 18일에 봤으니 5개월도 더 지난 일이다. 책 내용이 생각날 리 없다. 빨갛게 표시된 부분만 대충 훑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 나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눈에 책의 내용이 펼쳐진다. 그 중에서 <누나에게 욕지거리>라고 표시된 부분이 흥미롭다. 누나가 둘 있었던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던 욕지거리였다.


"야, 나쁜 마녀야! 억센 털 러시아 고양이! 너는 사관생도한테는 절대 시집 못 갈 거야! 군화 닦을 돈도 없는 가난뱅이 졸병하고나 결혼해라!"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한 데에 화가 잔뜩 나서 집 밖으로 나왔다. (55)

방구 카지노 정문에서 공장 주인이 장난감을 한 트럭 내다판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제는 글로리아 누나에게 거기까지 데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사관생도를 보고 싶었던 누나는 이 팽계 저 핑계 대면서 제제의 애원을 뿌리쳐 버린다.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제제가 폭발해서 위와 같은 욕지거리를 했다. 글로리아 누나에게 낭비한 시간 때문에 제제가 겨우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난감은 다 팔려버렸다. 아주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나도 어릴 적 하늘 같은 큰누나에게 덤빈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났다. 빨갛게 표시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책을 읽었던 독자라면 장면이 구체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괄호는 쪽수)


1. 너무 조숙한 제제(18) 2. 경제적 빈곤의 위기(19) 3. 에드문드 아저씨의 가족들에게 위로받다(23) 3. 제제의 대부는 악마(33) 4. 물건들과 대화하는 아이(34~35) 5. 동생에게 사기 치기 점점 어려워진다(37) 6. 불쌍한 엄마(43) 7. 가난뱅이라 슬픈 아빠(73~74) 8. 엄마도 세게 때렸다(96~97) 9. 아기 예수 원망(267~268) 10. 동네 전체의 문병, 그리고 아리오발두 아저씨(271~273)

나는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파란색 볼펜에 취해 있었다. 베껴 쓰는 황홀함은 읽을 때만 좋았던 것을 몰랐다. 읽고 나서 파란색으로만 이루어진 메모장들은 마치 '영혼 없는 독서의 현장' 같았다. 지금은 번거로워도 빨간색 볼펜으로 꼬박꼬박 표시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남는 장사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전이 되어 버린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개의 약을 제시한다. 파란약을 먹으면 지금처럼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진실을 평생 보지 못한 채로 죽게 된다. 하지만 빨간약을 먹으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보게 되지만 고통스러울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빨간볼펜과 파란볼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해석하고 발언한 말들이 나의 진정한 지식을 구성한다.

빨간 볼펜으로 책 읽기를 하면 끝까지 간다. 인생이 끝날 때까지 독서의 재미와 감동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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