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팅 독서'와 '빨간펜 독서'의 차이점
만약 자신이, 또는 아이가 독서를 통해 요약 능력, 사고와 판단 능력, 글쓰기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눈으로만 읽어서는 이런 귀중한 능력이 자동으로 생기지 않으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나는 20년 동안 메모 독서를 하면서 최근 몇 년간 도약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 집필을 하면서 읽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독서력이 신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랜 시간 독사를 하는 것과 위의 능력은 직접적인 상관 관계는 없는 셈이다. 독서를 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건데,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나의 마음을 한적한 연못이라고 생각해 보자. 눈으로 책을 읽는다는 건 책을 던지는 행동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이 풍덩하는 순간 큰 파장은 일겠지만 점점 고요해질 것이다. 그런데 빨간펜으로 읽는 부분에 대해서 짧게 코멘트를 한다면? 연못에 책으로 만든 종이배를, 그것도 프로펠러가 달린 배를 띄우는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책배는 나의 마음속을 부지런히 떠다니며 자극할 것이다. 잠자고 있던 생각들을 깨워서 파도가 일고 너울이 만들어져 머리는 어느새 고요한 연못에서 넓고 역동적인 바다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메모를 하느냐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서 베껴적는다. 이 때 너무 긴 구절은 고르지 않도록 하자. 머리가 먹기 좋은 정도로 썰린 문단이라야 오래 간다. 베껴쓰기를 하면 빨간펜으로 코멘트를 남겨 보자. 코멘트는 미래의 나, 이 책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을 잊어버린 나에게 해주는 편지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어떤 내용으로 '한줄'을 채워야 할지 알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어린이 청소년 리터러시에 관심을 갖고 가르쳐 왔다. 리터러시는 미국에서는 의무적으로 교육하는 '문해력'의 영어 낱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책을 읽는 제대로 된 방법이 없다면 세상을 읽는 관점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은 나는 꽤 절박하게 이와 같은 주제에 매달렸다.
아이들 어른이든 '요약 능력'은 시급한 도입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 교육과정 속에서 요약 능력은 '빠진 고리(missing link)'같다. 배워본 기억이 없다. 요약이란 단순히 글의 내용을 줄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그 증거다. 실제로 요약을 해보면 분량은 별 의미가 없다. 시각적인 이미지일 뿐. 요약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경험으로 말하자면 요약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인 행위다. 읽은 사람의 관점이 많이 반영된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도 매우 주관적이라는 사실이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책을 여러 명이 읽고 이야기를 나눌 때 특히 재미가 있는 까닭은 읽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구절을 베끼거나, 좋은 구절을 표시하고 빨간색 펜으로 코멘트를 남기려고 하면 내용 전체를 한마디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생각근육이 강해진다. 단지 책의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눈팅 독서'와는 이제 이별하는 순간이다.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빨간색 코멘트를 10개만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보라. 책으로 만든 배가 생각의 바다를 힘차게 헤쳐가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요약 훈련은 단지 독서에서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친구와 이야기를 하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응용된다.
그러면 빨간펜 독서법이 글쓰기 펀치력은 어떻게 키울까? 짧게 코멘트한 내용은 '생각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로 하건 글로 하건 꺼내서 쓸 수 있다. 요즘말로 하면 '즉시전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최근 읽었던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읽고 친구와 나누었음직한 대화를 구성해 봤다.
친구 : 너 요즘 무슨 책 읽니?
나 :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읽었어. 이 책을 읽고 나서 공자가 '뜻 밖의 혁명가'라는 사실을 알았어.
친구 : 설마? 공자는 옛것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복고주의자인데 어떻게 혁명가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단 말이야?
나 :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거든. 그런데 공자는 세습귀족이 득실거리던 춘추시대 말기에 전면적인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주장했어. 오로지 능력과 덕망에 의해서만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고. 공자가 이 주장을 한 뒤 수세기 안에 세습적인 귀족정치는 중국에서 소멸되었지. 공자는 그 누구보다 이 구조를 파괴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어.
위 대화의 핵심어는 '뜻 밖의 혁명가'이다. 《공자, 인간과 신화》 11쪽의 한 문단을 읽고 나는 '뜻밖의 혁명가'라는 코멘트를 달았고, 대화에서 사용했다. 친구가 무슨 뜻인지 되물었을 때, 책의 구절을 설명해주었다. 퍽 자연스러운 대화가 아닌가? 만약 친구가 아니라 이성 친구라면 나에게 호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의 단위를 적절히 배치하면 좋은 대화가 될 뿐 아니라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빨간펜 독서로 책 한권을 다 읽었다면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만 눈으로 훑어보자.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아니라, 자신이 쓰고 싶은 주제와 관련된 책의 내용을 추렴하는 것도 용이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빨간펜 메모가 없다면 책을 다시 읽거나 메모를 다시 읽어야겠지만, 생각의 단위로 곱게 정렬된 메모장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좋은 글은 좋은 독서 방법이 견인한다는 말은 진리다.
궁극적으로 독서는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읽는 행위다. 책은 나를 자극하는 도구일 뿐이다. 빨간펜은 책만으로 하지 못한 강한 자극을 주고자 고안한 방법이다. 책이 아니라 나를 읽으려면 눈팅독서 대신 '빨간펜 독서'를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