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던 책은 멀고, 썼던 메모는 가깝다
책이라도 다 같은 책이 아니다
영혼을 울리는 주옥 같은 문장이 담긴 책을 읽을 때의 황홀함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나의 서가에는 특별한 칸이 있다. 바로 메모 독서를 한 책들을 모아 놓는 곳. 심심하거나 딱히 읽을 책이 떠오르지 않는 날은 메모들을 뒤적인다. 책은 영혼의 정거장이다. 메모는 영혼이 열심히 반응하던 기억들. 책은 만져지지만 메모는 더 선명하고 강한 촉감을 준다. 이것들은 과거가 아니다. 하필 이 구절을 골랐을까? 그 때의 감정들을 탐색하는 기분도 편안하다. 인간은 셋 이상의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수학자들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과거의 아름답고 자랑스러웠던 순간들, 생각이 열심히 운동했던 소중한 순간을 매번 떠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독서 메모에 달라 붙은 문장들과 나의 생각들은 영혼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 이것이 소중한 까닭은 그냥 책이 아니라 '나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의 책은 특별하다. 내가 메모한 책은 나의 대변자다. 내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말해 주었기에 나의 지지를 받은 것이니까.
독서를 하면서 했던 메모들은 두뇌의 어느 부분에 각인이 되어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꺼내기 좋다. 어떨 때는 책의 느낌만
읽고 있는 책은 가깝지만 읽고 난 책은 멀다. 책의 어느 구절을 끄집어내고 싶어서 애를 써본 사람을 알 것이다. 나도 메모를 하지 않았던 책의 내용을 뒤적이다가 두어 시간 진을 빼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메모를 했던 책들에서 이런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특히 글을 쓸 일이 많은 사람은 심각한 고민이 될 수도 있다.
파스칼이 했던 말 중에서 유난히 책 쓰기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구절이 생각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다행히 예전에 한글 파일에 타이핑해둔 것이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저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저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저작''이라고 해야 한다. ㅡ 파스칼 《팡세》
메모를 했다고 해서 다 찾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낱말 몇 개를 기억하면 찾아내기가 더욱 쉽다. 나는 '나의 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에는 '나의 저작'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메모 독서 10년쯤 되었을 때는 파일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독서 경험을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적용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건 뒤에 가서 차차 이야기를 할 것이다.
메모 독서를 읽는 것은 또 하나의 독서다. 이미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듯, 읽었던 책의 메모를 다시 읽으면 같은 책을 읽었던 다른 누구보다 책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눈 느낌이 들 것이다. 사람이든 책이든 깊이 알아갈수록 좋으니까. 틈틈히 메모를 하고, 메모했던 것을 다시 읽는 그 강렬한 느낌을 당시도 경험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