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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많이 하고 나면

by 다작이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대체로 그건 어딜 가서든 나이 든 사람이 말하는 걸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잘 얘기해 봤자 훈화조의 말을 피할 수 없는 탓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보니 아무 데나 나서지 말고, 그럴 바엔 차라리 써야 할 자리에선 돈이나 쓰는 게 더 낫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이 지갑을 여는 것도 쉽지 않다. 꼭 불경기라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돈을 써야 할 자리라는 표현도 지금 같으면 충분히 허세를 부린다거나 나대는 행동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 들어서 허세를 부리거나 나서는 것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어떤 해결책을 제시한다든지, 아니면 다 같이 생각해 보자,라고 하며 쓸데없이 심각한 얘기를 꺼내는 것 또한 그러하다. 가만히 있어도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 이럴 때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런 시대의 변화를 부정하며 몸부림을 치곤 한다는 것이겠다. 쉽게 말해서 '나 때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하며 이미 지나가 버린 그 좋았던 시절 속에 젖어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꼰대가 되는 지름길로 접어들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개꼰대 소리를 듣게 되고, 어감상 이상하기는 하나 남들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려 드는 '씹선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서글픈 건 이 씹선비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면 어딜 가든 환영은커녕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조금 더 신중하고 진중하게 처신해야 할 이유가 아닌가 싶다.


또 써야 할 자리에서 돈 쓰기에 너무 인색하게 구는 것만큼 보기 싫은 것도 없다. 물론 여기엔 치명적인 결점이 존재한다. 돈을 써야 할 자리인지 아닌지를 자신이 판단하려 들면 낭패를 보기 쉽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돈은 돈대로 쓰고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나 욕밖에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장자라는 이유로 아무 때나 나서서 돈을 쓰는 것 역시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그러면 앞의 말은 이렇게 고쳐 말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아라.


누가 들으면 내 나이가 꽤 많은 듯 보이겠지만, 여전히 지하철이나 버스 등에서 경로석에 당당히 앉아 갈 정도의 나이는 아니다. 다만 내 생활 환경에선 꽤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라는 것이겠다.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과는 서른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마치 구세대 사람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가 되어 있는 걸 보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커피를 마셔도 내가 사야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요즘 세대들은 그런 식의 일시적인 신세 지는 행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얻어먹는다거나 어떤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걸 두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신세 졌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런 식의 엮임이 불편하기 때문일 테다.


뿐만 아니라 어지간해서는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없다. 단지 옆에서 보고 있던 연장자가 도움이 될까 싶어 손을 뻗는 순간이 오는데, 그들은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선의에서 비롯된 한마디의 말과 작은 배려가 민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했고 사람들의 생각은 예측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예전처럼 어떤 것이 맞는지 혹은 틀리는지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데다, 도리나 이치에 맞는 말과 행동 등을 운운하면 폐물 취급을 감수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세상과 세대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각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침해하는 모든 것들은 철저히 배척된다. 그것이 어떤 생각이든 특정한 사람이든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말을 많이 하고 나면 입이 아파야 정상인데, 오히려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곤 한다. 허탈하다, 허무하다, 의미 없다, 쓸데없다 등 내가 한 그 많은 말들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무기력하고 초라해지고 만다.


침묵은 금이라고 했다. 옛말치고 틀린 말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말을 아끼며 살아야겠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연장자라는 무게감, 나이 든 이로서의 책임감 따위를 생각해서라도 헛소리를 남발하며 시간을 죽이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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