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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다면

69일 차

by 다작이

얼마 전엔가 '제목을 입력하세요'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매번 이 앱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 대하게 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은근히 신경을 돋우곤 했던 게 바로 제목 쓰기였기 때문이겠다. 사실 글을 쓰는 순서로 봤을 때 제목부터 먼저 써야 하는 게 올바른 절차이기는 하다. 나침반 혹은 방향키도 없이 거친 밤바다로 배를 몰고 나갈 순 없을 테니까. 그렇게 보면 글의 제목은 내비게이션과도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어떤 경로를 통해야 갈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내비게이션에 안내에 의존하여 목적지를 찾아가듯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이 제목을 보고 글을 쓰게 될 테다.


오늘도 지하철을 타는 즉시 브런치 앱부터 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지하철 역에 도착할 때까지, 역사의 계단을 거쳐 승강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오늘은 뭘 쓸까, 하며 고민해야 했다. 좋은 글을 쓰느냐 못 쓰느냐는 차치하고라도 글을 쓸 때마다 늘 같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아침마다 그랬다. 마치 거짓말처럼 머릿속이 텅 비기라도 한 듯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럴 때에는 차라리 누군가가 글감을 던져주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때 오래전 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기억이 꽤 희미한 걸 보면 전체적으로 그다지 인상 깊은 작품도 잘 만든 애니메이션도 아니었다. 오랜 기억 탓인지 한 번 봤다는 것 여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구체적인 배경과 주인공은커녕 어떤 줄거리의 이야기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그 작품만 생각하면 난데없이 하늘에서 비처럼 음식이 쏟아져 내리던 장면만 떠오른다. 아마도 그 장면을 보며 가끔 저런 일이 일어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 장면을 빼면 어떤 기억도 없는 애니메이션이 지금처럼 종종 생각이 나는 이유는, 글을 쓸 때마다 글감이 없어서 헤매거나 또 무슨 제목을 붙여야 할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때의 그 음식처럼 하늘에서 글감이 쏟아져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생각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선 음식이 쏟아져 내리고 있을 때 등장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난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전에 그것들을 일일이 모으러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만으로도 문젯거리 하나가 해결되었다. 얼른 '하늘에서 글감이 툭 떨어진다면'이라고 제목부터 적어 넣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이제 글의 절반은 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글감이 정해지면 제목을 뽑아낼 수 있듯 제목을 먼저 적어도 글감은 자동으로 선택된다. 게 됩니다. 물론 글감을 정한 뒤에 글을 다 쓰고 나서 제목을 써넣을 수도 있다. 순서가 어떻게 되건 간에 글감과 제목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공공도서관에 들렀다가 수 백 개의 글감을 한 데 모아놓은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외국인이 쓴 책인데 선 자리에서 몇십 쪽을 읽어 봤다. 글을 쓸 때 글감을 찾는 일에 애를 먹는 건 만국공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용으로도 책을 쓸 수 있다니, 아이디어가 꽤 기발했던 책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생각만큼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던 책이었다. 책 속에 소개된 수백여 가지의 글감들은 어지간해선 나 역시 한 번쯤은 써먹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글감이라는 건 글을 쓰려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는 한 그림의 떡이 되기 십상이다. 설령 내 상상처럼 누군가가 글감을 던져준다고 해서 그것이 내 글감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글감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어떤 방식으로 글을 풀어나가야 할지도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가끔은 하늘에서 글감이 툭, 하고 떨어지는 장면을 기대해 본다. 혹은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옆에서, '오늘은 이걸로 써 봐'라고 하면서 글감을 던져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곤 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나는 오늘도 글감을 찾아냈다. 또 제목도 입력했다. 게다가 이 어설픈 글감과 제목으로 이렇게 한 편의 글까지 썼다. 뭐, 그러면 된 것이 아니겠는가? 글을 완결하는 것이 목적인 내게 이 이상 더 바랄 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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