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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제대로 부르기

by 다작이

소설을 쓰는 사람을 우리는 소설가라고 지칭한다. 착각해선 안 된다. 작가가 아니다. 또 시를 쓰는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혼동해선 안 된다. 소설가를 작가라고 부르는 게 알맞은 이름이 아니듯 시인에게 작가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도 올바른 경우가 아닌 것이다. 비싼 밥 먹고 무슨 하나 마나 한 말을 하고 있냐고 한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수필은 수필이라 하지 않고 에세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왜 수필을 쓰는 사람은 수필가라 부르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에세이스트라고 지칭하는 게 당연한 게 되는 걸까? 어쩌면 은근히 우리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문화사대주의적 근성 때문이 아닐까?


한 번이라도 문학개론을 들어본 사람은 문학의 4대 장르는 시, 소설, 수필, 그리고 희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시, 소설, 에세이, 그리고 희곡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낱말의 의미를 보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에세이는 오히려 미셀러니와 함께 수필에 속하는 형식의 글을 뜻한다.


원래 수필은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경수필은 말 그대로 가볍게 쓸 수 있는 잡문 형식의 글 또는 신변잡기적인 글을 말한다. 이런 경수필을 우리는 미셀러니라고 지칭한다. 이와는 달리 경수필보다는 다소 무겁게(?) 쓸 수밖에 없는 중수필은, 사회적인 주제 또는 철학적인 사색 등을 무거운 논조를 통해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글을 말한다. 이 중수필 속에 바로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에세이가 포함된다. 참고로 에세이에는 중수필, 학술적 논설문 및 소논문, 대학 과제물, 그리고 자기소개서 등이 포함된다고 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흔히 우리가 에세이라고 부르는 글이, 사실은 에세이가 아니라 미셀러니에 가깝다는 사실이겠다. 그렇게 따진다면 유행처럼 번진 '에세이스트'라는 말을 올바르게 쓰려면 '미셀러니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말이 난 김에 하나만 더 덧붙여 말해 볼까 한다. 좋다. 지금 통용되는 방식으로 얘기해 보겠다. 만약 내가 에세이로 등단하거나 책을 출간하면 사람들은 내게 '작가'의 호칭과 함께 '에세이스트'라는 명칭을 부여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필가'가 되겠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소설로 등단하거나 출간하면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회적인 통념에 따르자면 보나 마나 '소설가'가 아니라 '노벨리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혹시 시로 등단하거나 출간하면 '시인'이 아니라 '포이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어로 쓰려면 다 영어로 쓰는 것이 통일감이 있고, 우리말로 쓰려면 다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작가'의 하위 예술가들에게 왜 이렇게 무분별하게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엄밀하게 말하면 뻔히 있는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말이다. 더군다나 사전적인 정의로 봤을 때에도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왜 그렇게 표현하는 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이름이라는 건 그 이름이 붙게 된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명칭을 혹은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일이 선행되어야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와 제대로 된 의미를 갖게 되는 법이다.


누군가는 내게 수필이라고 부르든 에세이라고 지칭하든 글만 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명칭이 아니라 완성된 질 높은 한 편의 글일 테니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명색이 글을 쓰고 작가를 희망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달라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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