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장에서의 일을 마치고 역으로 왔을 때의 일이었다. 기차가 들어오려면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예전처럼 날씨도 덥지 않아 바람을 쐬기에 제격이었다. 종종 들르는 광장의 한편으로 갔다. 한 편의 시가 적혀 있는 큰 돌을 오랜만에 들여다보았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는 시였다. 그 짧은 시는 읽을 때마다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디카시 같았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실감 나게 하는 시를 보며, 글이라는 건 무릇 저렇게 임팩트 있게 써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한창 시를 음미하고 생각에 젖어 있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어떤 냄새가 코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향'이 아니라 냄새라고 표현하면 딱 맞을 담배 냄새였다. 아마도 지구상의 절반쯤은 싫어하지 않을까? 문득 그곳이 흡연구역이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엄밀하게 말해서 십여 미터는 더 광장 바깥쪽으로 나가야 흡연구역이었다. 버젓이 표지판도 있었고 가끔 계도 요원도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그러고 있는 건가 싶어서 냄새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긴 걸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될 테지만, 인상 자쳬가 규칙 준수와는 거리가 먼 남자로 보였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내내 그 연기를 고스란히 흡입하고 있던 두 아이들이 보였다는 점이다. 아마 직업적인 본능이 발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얼핏 한눈에 봐도 그 아이들은 초등학생으로 보였다. 얼굴이 닮은 데가 꽤 많은 걸로 보아 남매지간인 듯했다. 누나는 5학년, 또 남동생은 3학년쯤 된 것 같았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는 바로 아이들의 아빠일 터였다.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을 놓고 나 혼자 온갖 상상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을 볼 때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런 수순을 밟곤 한다. 엄마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생각까지 간다면 내가 너무 멀리 가는 것일 테다. 그런데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기엔 너무 행색이 꾀죄죄했다. 만약 그 남자가 아빠가 맞다면 그런 아이들 옆에서 저러고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빠로 보이는 그 남자가 아이들을 보며 어떤 곳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이내 아이들은 광장에 조성된 싸늘한 돌의자 위에 앉았다. 였다. 그때 난 남자가 담배꽁초를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식들이 보고 있는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마치 무슨 액션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불이 붙은 담배를 멋들어지게 길바닥에 내던지고는 발로 짓이겼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열 걸음만 걸으면 있는 흡연구역 부스 안에 쓰레기통이 있는데도 말이다.
한 개비를 다 피우는가 싶더니 이내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긴 그게 두 번째 담배인지 아니면 세 번째의 것인지 나로선 알 도리가 없다. 아무리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고 해도 좀처럼 나는 그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백 번 양보해서 자기 아이들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다른 아이도 아닌 자기 자식들이 옆에 있는데도 무슨 생각으로 저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건가 싶었다.
나 역시 흡연자이지만, 솔직히 나라면 그런 행동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자식이 뻔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담배를 피우는 그 자체를 갖고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또 흡연자의 자격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을 테다. 본인의 건강에 해로운 데다 타인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긴 하나, 어쨌건 간에 담배는 기호품에 속한다. 피우고 안 피우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남에게 피해를 덜 끼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때 최소한 담배를 피울 만한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닐까?
순간 과연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저런 부류의 사람을 감히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지칭하려 한다. 자기 자식들이 보고 있는 데서 어쩌면 저렇게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걸까? 물론 자식 앞에서만 조심하고, 딴 데 가서는 마음껏 행동해도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자식이 보는 데서도 저따위로 행동하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겠나 싶었다.
저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인성 교육의 기회를 기대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결론을 짓는 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는 걸 모르진 않으나, 내가 본 모습에서는 그렇게 결론이 날 수밖에 없었다. 늘 생활 속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는 나로서는 그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저런 부모에게서 아이가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의 변화가 급변해지는 지금, 아무나 부모의 도리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듯하다. 명색이 부모라면 아이들을 책임감 있게 길러내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냉철한 자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제 본 그 장면은 내게 부모된 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