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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남자는 누구인가?

by 다작이

며칠 전엔가 무심코 유튜브를 보다가 꽤 오래전에 방영했던 어떤 예능프로그램의 편집본을 보게 되었다. 유명 MC가 진행하고 우리나라에 유학온 미녀 외국인들 다수가 출연해 온갖 수다를 떨던 프로그램이었다. 대체로 맞은편에선 우리나라 여성들도 출연했다. 어지간해서는 글을 쓸 때를 제외하면 유튜브 따위를 들여다보지 않으니 그런 내게도 꽤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한동안 '비정상회담'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과 틀이 비슷해 보였지만, 질적으로는 완전히 결이 다른 프로그램이었다. 재한외국인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그들이 가진 독특한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한다면 그저 시간 소일용으로나 알맞은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나마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아주 가끔 보기는 했다. 그들의 생각, 즉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생각이 다소 흥미롭다고 느꼈기 때문이겠다.


내가 본 그 영상 속에서 여자를 때리는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자든 남자든 가릴 것 없이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것은 차마 사람으로선 할 짓이 아닌 것이다. 설령 아무리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해도 여자를 때리는 남자들에 대해선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을 정도니까. 예를 들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여자를 패냐고 하며, 그 어떤 이유로도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열등한 여자를 때리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를 때리는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가 있다고 하니 귀가 순간 솔깃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죄질이 나쁘면 사람을 때리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하는 것인가 싶었다. 과연 어떤 유형의 남자가 더 나쁜 남자일까? 이목을 집중하며 영상을 보다 하마터면 자지러질 뻔했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떤 남자가 더 나쁜 남자라고 생각하는가?


여자를 때리는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는 키 작은 남자예요.


우리나라 출연자 중 한 명이 얼굴에 미소를 드리운 채 또박또박 힘주어 얘기했다. 발언 자체도 충분히 경악할 만했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외국인들과는 달리 대체로 수긍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우리나라 출연자들이 보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순간 나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미모가 나름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로 초대되어 나왔을 법한 여대생이,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그렇게도 당당히 얘기하는 것을 보고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살다 살다 온갖 얘기를 다 들어봤어도 이런 얘기는 처음 들었다. 게다가 정말 더 가관이었던 것은 그 옆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우리나라 여대생이 한 말이었다. 남자로 태어나 키가 180cm이 안 되는 사람들은 모두 루저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영상을 보던 내내 지워지지 않던 건, 우리나라의 여대생을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우리나라 여대생들은, 이게 뭐 어떻냐고 반문하 듯 천연덕스럽게 자기의 생각을 마구 뱉어내기만 했다. 그런 우리나라 여대생의 순진무구한(?)표정이 좀처럼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다.


사실 이 영상은 꽤 오래된 것이었다. 족히 십여 년은 넘었던 걸로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당시 문제의 발언으로 인해 해당 발언을 한 여대생은 '루저녀'라는 별칭까지 얻었고, 이에 화가 난 수많은 180cm 미만의 남자들에게 온갖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179cm이든 160cm이든 두 사람 모두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생각 없이 발언하거나 적극 동의하며 부연 의견까지 낸 한두 출연자의 언행이 문제겠지만, 사람들은 저리 당당하게 말하는 건 비단 몇몇 여대생들의 생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때린 기억이 없다. 물론 그걸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여자를 때린 것보다 더 나쁜 남자가 되고 말았다.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나저나 그때의 그 당당했던 '루저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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