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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는 줄 알아요?

by 다작이

한창 소설을 쓰느라 노트북과 사투를 벌이던 어느 날의 저녁, 예고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온 신경이 노트북에 가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지금 뭐 해?"

아내였다. 열린 문 틈으로 음식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저녁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내겐 퇴근하자마자 방으로 직행해 노트북부터 부팅시킨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소설의 스토리가 불현듯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럴 때는 시간이고 나발이고 죄다 멈추고 만다. 마치 단단히 잡고 있던 풍선의 끈을 놓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글 쓰고 있어."

차마 소설을 쓰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소설을 쓸 때마다 난 어쩔 수 없이 새가슴이 되고 만다. 십 년을 넘게 고시 공부를 하며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처럼,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된다.

"마침 두부가 똑 떨어졌네. 마트에 뛰어가서 두부 한 모만 사다 줘."

누구의 명이라고 감히 거역할까? 원래 마누라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했다. 이럴 때 나는 떡을 안 좋아한다며 버티고 있다가는 국물도 없는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


일단 휴대전화의 녹음기 앱을 켜고 지갑을 챙겨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가면서 보니 스물세 살 된 아들이 자기 방에 있었다. 다 큰 아들한테 시키면 될 일이지, 이렇게 바쁜 나를 꼭 시켜야겠냐는 듯 아내를 쳐다보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공부하고 있잖아. 내가 보니 지금 제일 한가한 사람이 당신 같아서."

글을 쓰는 게 왜 한가한 거냐고 물으려다 생각을 접었다. 그러고 있느니 사다 달라는 두부부터 해결하고 노트북을 다시 붙들고 있는 게 모로 보나 현명한 일이었다.


한 손에는 두부를, 다른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든 채 집으로 들어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게 타인에게는 노는 걸로 비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내 딴에야 사뭇 진지하게 작품을 구상하고 또 사력을 다해 쓰고 있어도 그게 그저 한가로운 짓이나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는 게 씁쓸할 뿐이었다.


방금 전에 반월당 야외 별치에 앉아 휴대전화 키패드를 정신없이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는데, 일면식도 없는 한 중년의 여인이 내게 뭔가를 들이밀었다. 얼핏 봐도 꽤 두툼해 보이는 A4 뭉치였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곧 밝혀졌는데, 며칠 전의 유쾌하지 않았던 두부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좀 여유로워 보이시는데 설문 조사에 응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원래 나는 사람에게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말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저, 지금 바쁩니다. 죄송합니다."


아마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봤다면 적잖게 놀랄 정도였으리라. 필요하다면 설문 조사쯤은 얼마든지 응할 수 있다. 만약 내가 특별한 일 없이 야외 벤치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순간 그때 제일 한가해 보이는 사람이 나였다는 아내의 말이 오버랩됐다.


다른 응답자를 찾기 위해 발길을 돌리던 그녀에게 마음 같아선 내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냐며 묻고 싶었다.

"나 지금 바쁘다고요."

아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왜 글을 쓰고 있으면 한가하게 그러고 있는 걸로 보는 걸까? 왜 소설을 쓰고 있으면 놀고 있는 걸로 생각하는 걸까?


"내가 노는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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