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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 Jan 27. 2023

미안하지만, 이젠 유명해져야겠어.

오늘 문득 인다(인문학다이어트) 과제를 하다가, 내 머릿속 어느 틈엔가 깊숙이 감춰져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왜 평범함을 지향하며 살아왔는지, 나는 왜 사람들 속에 숨기를 선택했는지, 나는 왜 글쓰기를 멈췄었는지.

그 이유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오래된 기억 속 한 사건이 문득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중학교 1학년, 교복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상급학교에 입학한 호기심 많던 소녀는 새로운 시작에 한껏 들뜬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3년 내내 입을 수 있게, 그야말로 뽕을 뽑아야 했던 이유로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큰 교복을 입고 있던 작은 소녀. 호기심만큼 걱정도 두려움도 많았을 그 소녀에게 한 친구가 다가왔다. 밝은 미소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친구. 소녀는 그 미소에 마음에 빗장을 열고 건넨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소녀는 그렇게 그녀와 친구가 됐다고 생각했다.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또래보다 글 쓰는 재주가 있어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나란히 상을 받기도 하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문예부에 들어가 귀여운 창작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어 함께 성장했다.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축제를 앞둔 어느 날, 축제날 조회대에 올라가 전교생을 대표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사람을 뽑는다고 했다. 그 한자리에 소녀가 뽑혔다. 소녀는 뛸 듯이 기뻤다. 목소리는 작고 부끄러움도 많은 소녀였지만 학교의 대표로, 그것도 단 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소녀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 어린 나이에도 마냥 감격스러웠다.



축제날이 되었고 소녀는 열심히 준비한 작품을 낭독하고 또 낭독하며 그날만을 위해 연습했던 결과물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날 소녀의 가슴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였다. 그 기억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소녀의 기억에 타투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날 이후로 겪게 될 또 다른 날카로운 기억과 함께 말이다.



그날 이후 교실의 공기가 무언가 달라져있었다. 소녀에게 미소를 보여주던 몇몇 친구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어있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던 친구는 소녀를 등지고 다른 친구와 손을 맞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재능을 나누며 함께 성장해 가는 줄로만 알았던 그 친구의 달라진 모습은 소녀의 마음을 걷잡을 수없이 낭떠러지로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외면받는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소녀는 어느새, 그들의 싸늘함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있었다. 그럴수록 지금 그 순간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소녀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고 신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자책의 감옥에 갇혀 일상을 지내던 소녀에게, 어느 날 가정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학교에서 상담을 맡고 있던 가정 선생님은 소녀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여럿이 몰려와 소녀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단다. 친구들은 소녀가 잘난 체를 하고 자기만 생각하며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친구들은 구체적인 일화를 이야기하며 선생님께 소녀를 고발했다고 했다. 소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난 그런 적이 없는데. 난 그런 적이 없어! 아니야, 선생님도 그러시잖아. 내가 그랬었나. 내가 그랬을 수도 있었을까. 나는 한 명인데 걔네는 여러 명이잖아. 걔들이 그렇다잖아. 그럼 내가, 정말 내가 그랬을까?'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엄마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소녀는 알았다. 그런 적이 없다고. 결코 소녀는 그랬던 적이 없다. 엄마도 알았다. 소녀가 그랬을 리 없다고. 엄마는 펑펑 우는 소녀를 꽉 안아주었다. 소녀는 더 크게 울었다.



소녀는 억울했다. 잠시 동안 자신이 그랬었나라고 의심한 그 순간도 억울했다. 선생님에게 구체적인 일화를 들었을 때 확신했다. 친구들을 소녀의 집에 초대해서 집 구경을 시켜주며 잘난 척을 했다고 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적도 없었고 소녀의 집은 자랑을 할 만큼 부자도 아니었다. 아빠는 동네 작은 카센터를 운영하는 소상공인이었으며 소녀의 집은 여느 평범한 작은 주택이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이야기했다는 소녀의 발언들도 소녀는 절대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모든 것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이다. 억울하고 억울했다. 신이 있다면, 이 억울한 상황에서 나를 꺼내주지 못한다면 제발 나를 차라리 죽어달라고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겨우 중학교 1학년이던 소녀는, 신에게 그렇게 잔인한 기도를 하며 하루를 견뎌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를 고발했던 친구들 중 한 명이 뜻밖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 친구의 고백은 이러했다. 'oo라는 친구가 주도해서 너를 가정 선생님께 고발하자'라고 했다고. oo는 자기가 소녀에게 당했다는 일화들을 열거하며 그 친구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에게 소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고 했다. oo가 열거하는 이야기들이 생각해 보면 소녀가 잘난 체를 한 것도 같고, 우리를 무시한 것도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함께 모여 가정 선생님께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녀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억울했던 마음도 조금은 풀릴 수 있었다. 그중 한 명이라도 소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화가 났다. oo는 중학생이 되고 처음 교실에서 만나 함께 손을 맞잡았던 그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같은 재능으로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친구였던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없는 말을 지어내고 심지어 왜 다른 친구들까지 끌어들여 소녀를 모함한 것일까. 그 결과로 소녀는 몇 날 며칠을 악몽 속에서 살아야 했다. 가장 좋아했던 가정 선생님에게 친구들에게 잘난 체를 하며 집단 왕따를 당하게 되는 간악한 학생으로 비친 것도 화가 났다. 가정 선생님은 왕따의 피해자인 소녀를 토닥여주기보다 사실관계만을 따지고 들었었다. 고작 중1인 아이들을 데리고 탐정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들도 미웠지만 소녀는 소녀가 좋아했던 가정 선생님도 무척이나 미웠다.



그 이후 친구들과 소녀는 자연스럽게 다시 가까워졌고, 그 일을 주도했던 친구에게 별다른 항의도 없이 집단 왕따의 일은 없었던 일이 되어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소녀에게 양심고백을 한 친구가 자신이 그런 얘기를 했단 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억울한 마음은 소녀의 귓가에 모든 걸 털어놓으라며 소리칠 때도 있었지만 소녀는 더 이상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그 일은 조용히, 소녀의 마음에 큰 구멍만을 남긴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갔다.



어린이를 벗어나 청소년이 되어 설렜던 순간도 잠시, 중학생이 되자마자 겪었던 소녀의 상처는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서까지 그녀의 삶 전체를 쥐고 놓아주지 않게 된다. 그 이후로 소녀는 글쓰기도 하지 않았다. 주목받는 일도 끔찍하게도 싫어하게 됐고 사람들 속에 지나가는 행인 1로 존재하기를 자처했다. 혹시 누군가가 소녀를 나쁘게 볼까 소녀는 늘 눈치를 봤다. 갈등을 빚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에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상대에게 느껴질 때는 소녀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중1 때의 그 죽을 만큼 괴로웠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다시 신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무너지는 마음을 스스로 더욱 채찍질하며 자신을 학대하고 또 학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짐작했겠지만 이 이야기는 나의 중1 시절 이야기이다. 그 시절 혹독하게 겪었던 왕따의 기억은 40이 된 지금까지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내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글쓰기를 멈췄던 이유도, 사람들 속에 평범하게 있기만을 바랐던 나의 모든 순간의 이유는 다 그때의 그 트라우마의 결과였던 것이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런 기억이 있었고 그 기억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진정한 나를 마주하지 못했다. 그 무서웠던 기억이 진짜 내 모습을 가리고 응달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난 오랜 세월 그 기억의 응달에서 나를 꽁꽁 얼게 만들었다..



중1의 상처받은 마음 그대로 한 뼘도 자라지 못하고 나이만 먹어버린 슬픈 소녀의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싶다.


'그래 나는 이제 알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그 무게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을지. 이제 내가 다 알아. 그러니 이제 조금씩 빛의 대지로 걸아 나가자. 이제 너는 걸어 나갈 힘이 있어. 너의 그 길에 내가 늘 함께할 테니까. 너는 걱정 말고 내 손을 잡고 걸어 나오기만 하면 돼. 나는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꽁꽁 얼어있던 나의 상처를 봉인 해제할 것이다. 오늘처럼 글을 쓰면서, 그때의 그 소녀를 안아주면서, 치유하지 못하고 응달 속에 얼어있던 나를 대지의 빛으로 걸어 나가게 해야지.



그리고 중1 때로 돌아가 울고 있는 소녀의 등 뒤로 웃고 있던 그 친구에게, 다 커버린 내가 그 소녀를 대신해 말해주려 한다.



이젠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난 절대 숨지 않을 거야.


미안한데, 이젠 나도 유명해져야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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