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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사진관 Sep 24. 2018

La Tomatina, 강렬했던 토마토의 추억

일요일의 게으름_ ep 07.

“거길 왜 가?” 

   

토마토 축제를 하나만을 위해 스페인에서 열리는 워크캠프에 참가한 내가 토마토 축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스페인 친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감히 세계 3대 축제 중의 하나인 라 토마티나에 간다는데 왜라는 질문을 붙이다니! 내가 스페인에 온 이유는 라 토마티나 하나인데 거기를 왜 가냐고?’


사실 나의 계획은 워크캠프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토마토 축제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국적의 친구들은 토마토 축제를 마치 보령 머드 축제나 평창 송어 축제처럼 작은 지역 축제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스페인 국적이 아닌 친구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비행 스케줄로 인해 나의 동행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날 몇일의 긴 설득 끝에 일본인 친구 한 명이 토마토 축제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을 조정하여 토마토 축제를 함께 즐기기로 했다.


워크캠프 종료 후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열리는 토마토 축제까지는 약 1주일의 시간이 있었기에 나와 일본인 친구는 각자 여행을 한 후 축제 당일 발렌시아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 폰이라는 것이 없었고 외국 여행을 할 때 휴대폰 유심을 사서 쓴다는 개념 조차 없었다.     


“그날 오전 7시에 빨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역 앞에 서 있을게.”  

“응. 그럼 나는 지금 입은 이 티셔츠를 입고 역 앞에 서 있을게.”    

우리는 나름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입을 옷에 대한 힌트만을 던진 채 작별인사를 했다. 당연히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에 비해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축제 당일 엄청난 인파로 붐볐다. 그 속에서 옷차림에 대한 단서만으로 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헛웃음으로 끝이 났고 엄청난 인파 사이에서 홀로 터벅터벅 걷는 나에게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혼자 오셨어요? 저희랑 같이 다니실래요?”    


또래로 보이는 한국인들이었다. 나에게 있어 여행지가 주는 묘한 매력 중 하나는 낯선 이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낮춰준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제안에 흔쾌히 예스를 외쳤고, 한국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세계 3대 축제에 임하는 자세에서도 나의 게으름은 빛을 발했다. 나와 동행하게 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목에 휴대폰이 담긴 방수 팩을 걸고 있었는데 반해 나는 정말 준비 없는 빈털터리였다. 방수팩은 준비할 생각조차 못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돈을 제외한 휴대폰도, 카메라도 모두 캐리어에 곱게 담아 기차역의 보관함에 넣어두고 온 것이다. 하지만 구세주 같은 한국인들은 방수 팩이 있었고 그들의 카메라로 기대하고 기대했던 토마토 축제로 가는 길의 모습을 기록할 수 있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부뇰(Buñol)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야 했다.     


‘여기서 세계 3대 축제가 열린다고?’     


축제가 열리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규모에 한 번 놀라고, 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그 마을 주민들의 거주지 한가운데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마을에는 3,4층으로 보이는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대부분이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곳처럼 보였다. 발코니로 보이는 곳들은 토마토 습격을 피하기 위해 비닐로 꽁꽁 감싸져 있었다. 이렇게 마을 풍경에 놀라고 있을 즈음, 11시가 되었고 큰 대포소리와 함께 축제가 시작되었다.     

40도가 넘는 불타는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보다 무서운 것은 살과 살이 맞닿으며 전해지는 타인의 36.5도 온기였다. 그 온기가 땀과 범벅이 되어 얼굴을 찌푸리려는 순간 족히 10명은 넘어 보이는 장정과 토마토를 한 가득 실은 커다란 트럭이 나타났다. 그 트럭의 아래로는 토마토 즙이 길바닥에 뿌려지고 있었고 위로는 장정들이 토마토를 으깨어 던지고 있었다. 트럭이 골목골목을 누빌 때마다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로 커다란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벽 쪽으로 밀려가며 코팅기에 빨려 들어가는 종이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지고 말았다.

    

‘압사당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겠군.’    


토마토와 함께 아수라장이 된 골목에서 소리칠 힘도 잃고, 정신도 잃어 갈 때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토마토들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토마토 더미가 머리 위를 가격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렇게 압사의 위기를 몇 차례 겪으니 바닥에 쌓인 토마토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고 급기야 내 무릎까지 토마토 국물이 차 올랐다. 흡사 토마토 해수욕장을 방불케 했다. 날아오는 토마토를 피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토마토가 날아오고, 거대한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압사의 위기가 찾아오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일행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나중에야 깨달았다. 단순히 일행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의 토마토 축제 참가를 입증해줄 유일한 증거물인 사진까지도 잃어버린 것임을.  

   

한 시간여의 난리 끝에 큰 대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고 갑자기 골목을 둘러싼 건물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물줄기를 향했다. 그것은 마을 주민들의 작은 배려였다. 그들이 호스를 이용해 뿌려주는 물은 마치 생명수와도 같았다. 스페인의 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 토마토 즙과 물아일체 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생명수를 얻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 시간 동안 토마토 해수욕장에서 뒹군 흔적은 그 정도의 물줄기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몸에는 물론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토마토 껍질이 숨어있었고 그 상태로 해가 쨍쨍한 여름의 스페인 거리를 누비자 토마토 껍질은 이내 말라 접착제로 붙인 듯 몸과 머리카락 사이에 달라붙어버렸다. 길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온몸에서는 토마토 냄새가 났고, 길거리에도 토마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모두 토마토에 흠뻑 졌어 있었고 며칠은 길거리에서 노숙한 듯한 몰골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그것은 또 다른 축제의 시작이었다.


일행을 잃고 혼자가 된 내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전 세계 각 지에서 온 사람들이 말을 걸었고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이야기가 끝나면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누구보다도 쿨하게 서로의 갈 길을 갔다. 크루즈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다던 한국 대학생, 태권도를 할 줄 안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캐나다인, 특별하게 축제를 즐기고 싶어서 기모노를 입고 왔다는 일본인 등 국적은 모두 달랐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이제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누군가의 삶에 대해 잠시나마 아주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비록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햄버거에서도 토마토를 빼고 먹을 만큼 토마토 헤이터가 되었지만,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짧았던 만남은 누군가 던진


“토마토 축제 어땠어?” 라는 질문에


“음.. 너무 더웠고, 압사의 위험을 느꼈고, 이제 토마토를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아.”


라는 말 뒤에


“그런데 말이야!!!”를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거리의 예술가, Barcelona, Spain _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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