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게으름_ ep 02.
어딘가 여행을 간다고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말이 있다.
“야야. 내가 거기 가봤는데 거기 가면 이건 꼭 사야 해!”
쇼핑하러 간다고 한 말이 아닌데, “이건 꼭 봐야 해” 보다 더 자주 듣는 “이건 꼭 사야 해!”
사실 대학생 때만 해도 빠듯한 경비의 여행자였기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은 뭔가를 사는 것은 굉장히 사치스럽게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거리에서 파는 엽서나 그림 또는 그 도시의 특색이 묻어나는 소소한 아이템들이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이런 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아서 나는 아직도 여행할 때 값비싼 명품보다는 어느 골목의 작은 가게에서 파는 마그넷, 스노우볼, 오르골 등을 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때론 내가 산 것보다 더 예쁜 것을 옆 가게에서 발견하고 후회로 땅을 칠 때도 있고, 내가 산 물건을 옆 가게에서 더 싸게 파는 것을 발견하고 분노에 찰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그 물건에 담겨 여행이 끝난 후 돌아보면 웃음 나는 추억이 되곤 한다.
얼마 전 할슈타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같은 숙소에서 머물던 스무 살 대학생과 동행하게 되었고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는데 너무 예쁜 스노우 볼이 있었다.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처음 봤던 스노우 볼보다 3유로 비싼 스노우 볼이 더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싼값에 적당히 예쁜 스노우 볼과 조금 비싸지만, 더 예쁜 스노우 볼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게 스무 살 새내기가 한마디 던졌다.
“언니, 살까 말까 할 땐 사셔야 해요! 안 그러면 후회해요. 그리고 3유로면 한국에서 커피 한 잔 안 드시면 돼요.”
그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더 예쁜 스노우 볼을 집어 들었다. 요즘도 가끔 퇴근 후 그 스노우 볼을 흔들어 본다. 그리고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스무 살 새내기 친구를 떠올리며, 그 친구가 준 가르침을 떠올린다.
‘역시 안 샀으면 후회할 뻔했어. 내일은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겠어.’
여행지에서의 쇼핑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온도, 바람,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생가에서 산 오르골에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산책하며 느꼈던 어느 여름날의 작은 행복이,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산 미니언 물통에는 애도 아니고 이런 거 왜 사냐던 친구의 핀잔이, 베이징에서 산 마그넷에는 옆 가게에 가면 더 예쁜 마그넷이 있을 것이라며 추운 겨울 나를 이끌던 친구의 온기가, 괌에서 산 머리핀에는 이거 정말 머리에 꽂을 꺼냐며 경악을 금치 못하던 친구의 표정이, 스페인 Austria 워크캠프에서 산 액자에는 비를 맞으며 함께 관광했던 외국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깃들여있다. 비록 이 작은 사치들이 모여서 커피 몇 잔을 줄여도 상쇄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행지에서의 작은 사치를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