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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사진관 Sep 26. 2018

샌프란시스코의 잠못드는 밤

일요일의 게으름_ ep12

여행 중에 이메일을 확인해 본 적이 있는가? 나에게 이메일이라고 말 할 것 같으면 중학교 시절 반 친구들과 아무 의미 없는 혹은 시시 콜콜한 내용을 주고받았던 한참 지나버린 유행 같은 것이었다. 사실 직장에서도 딱히 이메일로 업무를 주고 받을 일이 없는 터라 나에게 이메일을 확인한다는 것은 지루한 강의를 듣다가 정말 너무너무너무 할 일이 없어서 혹은 검색 포털에 들어갔다가 버튼을 잘 못 눌러서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곤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여행을 하면서 이메일을 확인하다니? 샌프란시스코 여행이 지루한 강의 만큼 별로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 날 운 좋게 버튼을 잘 못 눌렀던 것일까?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냥 나는 그날,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속에서 클램 차우더를 즐기고 있던 어느 날, 이상하게도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뉴욕에 폭설이 내렸어. 그래서 너의 비행기는 취소 되었어. 매우 미안해. 대신 다른 비행편을 예약하거나 무료로 현재 항공편을 취소하도록 해줄게. 땡큐”      


베이글 한 입 베어물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든 채로 센트럴 파크를 거니는 뉴요커를 꿈꾸던 나에게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내가 미국에 온 이유 중 8할은 뉴욕 때문이었는데! 뉴욕에 못가게 되었다고?! 비행기가 취소 되었다고? 이 상황을 나보고 믿으라고? 때는 1월이었고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서부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한파로 난리인 뉴욕이 위치한 동부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온화한 날씨였다. 오죽하면 뉴욕의 거지들의 소원이 샌프란시스코의 거지가 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겠는가. 여하튼, 나는 이 난관을 극복해야만했다. 당시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짐싸서 공항으로 가기 전에 이메일을 확인해서 정말 다행이야!”

“어차피 뉴욕은 너무 추워서 센트럴파크에서 걷지도 못했을거야.”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봤어도 하나도 못 알아 들었을거야.”

“뉴욕가서 눈 때문에 숙소에만 있는 것 보단 훨씬 나아.”      


우리는 서로에게 신 포도를 한 입 가득 먹여준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1. 뉴욕의 숙소 취소하기

2. 뉴욕을 대체할 여행지 정하기

3. 셋째, 대체 여행지로 가는 항공권의 이용여부 알아보기

4. 넷째, 한국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뉴욕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 변경하기

5. 다섯째, 대체 여행지의 숙소 정하기.      


일행과 나는 함께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밤 잠을 설쳐가며 사색이 되어 이리저리 전화를 하며 보냈다. 사실 1단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센트럴파크 옆 가정집을 빌렸는데 집 주인에게 연락해서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미리 만들어 둔 영어 대본에 따라 헤비 스노우 스토리를 주절주절 하니 너무나도 쿨하게 자신은 100퍼센트 환불해 줄 수 있으나 예약을 중개한 사이트에 연락해서 수수료 여부를 확인하라고 했다. 그래서 예약 중개 사이트로 연락해 또 다시 헤비 스노우 스토리를 주절 주절 하니 항공사에서 받은 메일의 복사본을 보내면 100퍼센트 환불이 가능하다고 했다. 뉴욕 숙소 취소는 아주 기분 좋게 해결!


그리고 대체 여행지 선정도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LA로 결정! 하지만 세 번 째 단계부터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왜냐고? 항공사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표를 취소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가는 항공권의 이용가능 여부를 알아야하는데 1시간이 지나도 연결음만 계속되었다. 영어 전공자로서 부끄러운 사실이긴 하지만 처음에는 외국인과 전화를 통해 영어로 길게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두렵고 떨렸다. 항공사와의 통화는 앞서 만들어둔 헤비 스노우 대본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 그 두려움은 증폭되었다.


      

‘상대방 말을 못 알아 들으면 어쩌지?’

‘소통이 잘 못되어서 항공권 목적지가 바뀌면 어쩌지?’      


하지만 1시간 동안 연결음만 듣다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 보다 짜증과 분노가 앞섰다. 내가! 왜! 무슨 죄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여행을 하지도 못하고 전화기만 부여잡고 있어야 하는가! 항공사의 전화는 우리와 같은 불우한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폭주한 듯 했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항공사의 SNS계정을 찾아내어 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역시, 말은 글보다 빨랐다. 1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다행히도 항공사와 전화 연결이 되었고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으나 분노가 장착되니 Broken English가 술술 나와 생각보다 쉽게 LA행 항공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나자 SNS 담당자에게 답장이 왔다. 이미 문제는 해결 되었지만 바쁜 와중에 일일이 답장을 준 SNS 담당자에의 노고에 늦은 감사를 표한다. 나는 이 이후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행을 할 때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미리 내가 이용하는 항공사의 SNS를 팔로우 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10시간 같은 1시간이 지나고 이제 다음 단계인 뉴욕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LA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으로 바꿔야 할 순간이 왔다. 일단 항공권을 예약한 한국 여행사로 전화를 걸었다. 아뿔싸! 한국과 미국의 시차를 무시한 나는 영업시간에 다시 걸어달라는 기계음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항공권을 판매하는 회사가 한국 시차로만 일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나는 이내 투덜이가 되어 비난의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란! 워라벨을 주장하며 과도하게 일하는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비판 할 때는 언제고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24시간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투덜거린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대안을 찾아야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우리는 한국 여행사가 아닌 우리가 탈 비행기 항공사에 직접 전화를 걸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 항공사는 미국 항공사였고 쉽게 연결이 되었다. 나는 또 다시 헤비 스노우 스토리를 주절 주절 풀어 놓았다. 이쯤되니 헤비 스노우 스토리가 외워질 지경이었다. “Unfortunately, because of heavy snow...”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고 생각할 찰나.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은 헤비 스노우 스토리면 만사 오케이 내 뜻대로 일이 다 해결 되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 항공권의 발권 규정 중에는 출발지 변경 불가 항목이 있었고, 전화기 너머 항공사 직원은 헤비 스노우를 외치며 비굴함을 장착하고 불우함을 한껏 어필하는 나에게 쏘리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의지의 한국인 답게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더 높은 사람을 연결해주세요. 플리즈.”      


약간의 대기 시간이 있었지만 이내 수퍼 바이저와 연결이 되었다. 다시 한 번 준비한 헤비 스노우 스토리를 늘어 놓자 그는 잠시 숙고의 시간을 거친 후 수수료를 내면 출발지를 변경해 주겠다고 했다. 수수료를 지불하기 싫다면 돌아가는 항공권을 새로 사라는 말과 함께. 나와 일행은 당장에 수수료를 낼테니 항공권을 변경해 달라 부탁했고 무사히 아주 무사히 LA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예약할 수 있었다.

      

고단했던 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니 일종의 성취감이 몰려왔다. 역시 세상에 공짜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알았지만 이 성취감 뒤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제전화비! 당시 유심을 사지도 않고 급한 마음에 한국 휴대폰으로 미국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했더니 미국에서 미국으로 통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제 전화로 간주되어 무려 10만원의 국제 전화비가 곱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싼 전화영어 체험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지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유심만 구입했어도! 여행 준비만 철저히 했어도! 역시 게으른 자의 여행에는 준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준비 없음은 금전적 손실로 이어졌다. 이 얼마나 낭비하는 삶인가!  

    

그래도 뉴욕행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이메일을 확인했음에, 헤비 스노우가 나타난 시점이 뉴욕에 가기 전이었음에. 다행히도 LA에서 좋은 숙소를 구할 수 있었음에, LA의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야경을 봤음에, 디즈닐랜드와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음에 감사한다. 누군가는 나의 뉴욕행 불발에 대해 불운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불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운조차도 하나의 멋진 추억이자 무용담이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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