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게으름_ ep09
방콕 여행 중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을 꼽으라면 루프탑 바일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 호텔의 루프탑 바를 이용하며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나는 빠듯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 11시 일행과 함께 루프탑 바가 위치한 호텔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목적지를 영어로 설명했고, 기사 아저씨는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는 듯했다. 나와 일행은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방콕의 저렴한 물가와 마사지, 친절한 사람들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택시는 가도 가도 목적지에 도착할 줄 몰랐고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1시간이나 택시를 타다니! 호텔이 이리도 먼 거리였나?’
순간 나를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
누가 그랬던가.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나와 일행은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며 기사 아저씨에게 영어로 질문을 퍼부었다.
“아저씨, 호텔로 가는 거 맞죠?”
“얼마나 남았죠?”
“1시간이 넘게 걸리네요?”
“여기는 어디죠?”
“길 아시는 것 맞죠?”
우리의 질문 공세에 아저씨는 당황한 듯 “니어(Near)! 니어(Near)!”를 외쳤고 우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아저씨는 우리에게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밖을 보니, 깜깜한 도로 한 복판이었고 우리가 찾고 있는 호텔 같이 생긴 건물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당황한 나와 일행은 계속해서 “OOOO 호텔”이라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니어(Near)! 니어(Near)!” 뿐이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을 보자 멀리, 호텔이 아닌 병원이 보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 병원이.
우리는 계속해서 “낫 호스피털, 호텔!”이라고 외쳤지만 아저씨는 당황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아저씨와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너무나도 늦게 눈치챈 나와 일행은 핸드폰 번역기를 켜고 태국어로 된 호텔 주소를 보여주었다. 그제야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몇 분 뒤 택시는 호텔들이 줄지어 있는 강변으로 우리를 인도했지만 역시나 우리의 목적지 호텔은 아니었다. 잘못된 목적지에서 몇 분을 더 지체하다 아저씨는 현지인 호텔 직원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원했던 목적지로 안내해주었다. 시간은 이미 12시를 훌쩍 넘겨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여기 1시에 문 닫는데.”
나와 일행은 길을 몰라 헤맸던 택시 운전기사에게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을 분노로 마무리할 수 없기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어디냐며 서둘러 루프탑 바로 향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20분 정도 방콕의 야경을 즐기며 잔뜩 허세를 부릴 수 있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대화는 루프탑 바에서 암묵적 금기였던 택시 아저씨에 대한 분노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아저씨가 우리를 내려다 준 병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 병원 이름이 뭐였지?”
“아, 병원 이름이 호텔 이름이랑 조금 비슷하긴 하네.”
“근데 그 병원은 무슨 병원이었을까?”
“엄청 커 보이지 않았어?”
“그냥 종합 병원 아니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는 열심히 검색을 해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둘은 빵 터지고 말았다. 그 병원은 다름 아닌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트랜스젠더를 위한 병원이었던 것이다.
“헉. 우리 트랜스젠더 같아?”
“내 목걸이가 너무 과했나?”
“아니야. 내 걸걸한 목소리 때문일 거야.”
그제야 우리는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고,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을 큰 웃음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진작에 우리가 태국어 주소를 보여줬더라면,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아저씨에게 간단한 태국어로 목적지를 설명했더라면 목적지에 쉽게 도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어떤 이는 아저씨가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영어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것은 자랑할 만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거리에서 무작정 영어로 말을 질문을 퍼붓는 외국인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 거리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며 ‘그래도 한국 여행 오면서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배워서 오지. 어쩜 저렇게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방이 이해하기를 바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나 역시 별 다를 바 없는 무례한 이방인이었다.
다음번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를 여행할 때는 적어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OO는 어디에 있습니까’ 정도의 기본적인 표현 정도는 배워서 가야겠다. 그럼 적어도 또 다시 트랜스젠더로 오해받는 일 정도는 피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