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게으름_ ep08
시드니 블루마운틴 투어에 참여했을 때였다. 성수기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인해 지쳐 보이는 한국인 가이드는 관광지에 대한 설명보다는 빨리 이동해 달라는 부탁이자 재촉을 멈출 줄 몰랐고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나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만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혼자 올걸.’
호주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블루 마운틴을 온전히 즐길 수 없음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달달할 아이스크림으로 기분을 전환하고자 한 상점으로 향했다.
‘무슨 맛을 먹어야 또 다른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선택한 나의 1 Pick은 망고 아이스크림이었다.
타들어가는 호주의 1월. 더위를 뒤로 하고 상큼한 망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으니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금세 줄어드는 아이스크림처럼 나의 촉박한 여유도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내 집결시간이 되었고, 다행히 모두가 제시간에 도착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블루 마운틴의 또 다른 명소인 로라 마을로 향했다.
“여기서 1시간 동안 구경하시고요. 자유롭게 점심을 드시면 됩니다. 하지만 늦지 않게 모여주세요. 절대 늦으시면 안 돼요! 빨리 오셔야 합니다.”
홀로 점심 맛 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중, 가게 앞 유리에 비친 내 모습에서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 내 선글라스!!!!!’
블루마운틴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망고 맛에 취해 여유를 부리다 선글라스를 곱게 두고 온 것이었다.
‘한 시간 내에 선글라스를 찾아올 수 있을까? 가이드 언니가 늦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글라스고 그게 얼마짜리인데... ㅠㅠ’
무소유 정신으로 극복하고 가려는 마음과 머릿속을 맴도는 선글라스 가격 사이에서 심각한 내적 갈등이 생겼다. 결국 물욕은 무소유 정신을 이겼다. 그렇게 기부천사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1시간 내에 선글라스를 찾아오기 미션에 착수했다. 일단 침착하게 아이스크림 가게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다행히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이리저리 찍어 둔 사진 덕분에 쉽게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고,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신여성답게 구글 검색을 통해 가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혹시 아이스크림 가판대 옆 난간에 선글라스가 하나 있는지 알 수 있나요, 플리즈?”
“응? 난 지금 가게 안에 있어. 그걸 확인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너무 바빠. 5분 후에 전화 줄래?”
뚜뚜뚜 -----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고, 당황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청난 규모의 가게도 아니었고, 바로 나가서 확인할 수 있을 텐데 5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니. 더군다나 가이드가 점심시간으로 준 시간은 1시간. 1시간 내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나로서는 1분 1초도 지체할 수 없었다.
‘호주인은 참 불친절하군. 안 되겠다! 택시를 타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보자.’
순간 내 앞에 우리 팀 담당 한국인 가이드가 보였다. 하지만 지쳐 보이는 가이드에게 내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하자면, 안 그래도 지쳐 보이는 가이드를 더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내 사정을 설명하는 순간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현지인에게 택시 타는 곳을 물어보기로 했다.
“죄송한데요. 혹시 택시를 어디서 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순간 나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내가 무작위로 고른, 그 많은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우연히 고른 현지인은 호주인 여행 가이드였고 내 애처로운 상황을 들은 후 오히려 본인이 더 화를 내며 당장에 아이스크림 가게 전화번호를 내놓으라 했다.
“여보시오. 지금 제 투어 손님 중에 한 명이 선글라스를 거기 두고 왔다는데 지금 당장 확인해주시오.”
현지인 가이드 아저씨의 단호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전화기 너머로 즉각 대답이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너 선글라스 가게에 있데. 잠시만 기다려봐. 여기서 택시 타는 것은 힘들거든. 조금 있으면 내 투어 손님들이 올 거야. 그들이 허락한다면, 내가 너를 아이스크림 가게 앞까지 태워다 줄게.”
잠시 후 아저씨의 말대로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했고 여유 넘치는 손님들은 애처로운 코리안 투어리스트의 사연을 듣고,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갈 것에 흔쾌히 예스를 날렸다.
“그러니까 너는 한국에서 왔다는 거지? 나는 일본에는 가본 적이 있거든. 한국은 어떤 나라니?”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는 내내 가이드 아저씨는 투어 마이크를 착용한 채로 나에게 한국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마치 나는 그들의 투어에 초대된 특별 게스트가 된 듯했다. 미니버스를 가득 채운 10여 명의 유럽인들도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자신들이 궁금했던 점을 즉석에서 질문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투어를 지체시키는 이방인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버스 안은 여유가 넘쳐흘렀고,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한국인 특별 게스트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이 끝날 무렵, 우리를 태운 미니 버스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다다랐다.
“미안하지만 내 손님들 때문에 너를 로라 마을로 다시 데려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케이블카 예약 시간이 다가와서 말이지. 미안해. 가게 직원한테 이야기하면 콜택시를 불러 줄 거야. 내가 이야기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
친절한 가이드 아저씨는 나의 돌아가는 길까지 걱정해 주었다. 그렇게 나의 ‘1시간 내에 선글라스를 찾아라!’ 미션은 성공으로 끝났고, 심지어 시간이 남아 커피 한잔의 여유까지 즐긴 후 늦지 않고 집결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시간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버스에 타세요.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해요. ”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낯선 이의 뜻밖의 친절은 빨리 모여주세요로 시작해 빨리 모여주세요로 그저 그렇게 기억될 뻔했던, 나의 물음에 재깍 대답해 주지 않았던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에 대한 원망으로 끝날 뻔 했던 블루마운틴 투어를 따스한 웃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후 나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 그날,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한 친절을 떠올리며 먼저 다가가 도움을 주려한다.
“야. 오지랖 피우지 마. 무서운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냥 모른척해.”
어떤 친구는 나에게 아무나 도와주는 오지랖은 잠시 넣어도라는 조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내가 낯선 이에게 베푼 친절이 또 다른 낯선 이에게 친절으로 이어질 것임을. 그리고 그 작은 친절이 그저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르는 어느 낯선 이의 여행을 구해 줄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