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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사진관 Oct 03. 2018

게으른자의 아날로그 여행

일요일의 게으름_ep 01

‘휴대폰, 옷, 치약, 칫솔, 화장품, 귀걸이, 상비약, 영양제, 선글라스, 휴대폰 충전기 아차차 읽을 책을 빼놓아선 안 되지!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여행을 하루 앞두고 짐을 챙길 때면 괜히 이것도 필요할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아 점점 짐의 크기가 늘어나곤 한다. 평소에 잘 입지도 않던 옷이 괜히 여행지에서 빛날 것 같아 챙겨 넣고,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색조 화장품도 괜히 여행지에서는 필요할 것 같아 챙겨 넣고, 평소에 잘 읽지도 않는 책도 비행기에서 유용할 것 같아 한 권을 고르다가 괜히 한 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두 권을 챙겨 넣는다. 아무리 챙기고 챙겨도 필요해 보이는 물건은 끝이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여행 끝에 깨달은 사실은 꼭 필요하다 느꼈던 물건을 두고 왔더라도 여행지에서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이다. 매번 여행 짐을 꾸릴 때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이 문제지만^^;

현실을 떠나 여행지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일과를 형성하게 된다. 그 새로운 일과에는 있으면 유용한 물건은 존재하지만, 필수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서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필수품이 오히려 캐리어를 무겁게 만든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이 책만 아니었어도 캐리어가 훨씬 더 가벼웠을 텐데.’

‘이 두꺼운 스웨터만 아니었어도 기념품을 더 사갈 수 있었을 텐데.’     


특히 울퉁불퉁한 돌바닥에서 낑낑대며 여행용 가방을 끌다 팔이 끊어질 듯한 순간, 젖 먹던 힘을 다해 여행용 가방을 번쩍 들어 버스에 싣는 순간, 쓸데없는 물건들로 여행용 가방을 가득 채워 온 욕심쟁이 나 자신이 너무나도 미워진다.     


누군가는 휴대폰만큼은 그래도 여행 필수품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휴대폰 역시 있으면 유용한 물건이긴 하지만 필수품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때론 지도가, 때론 카메라가, 때론 정보의 원천이, 때론 MP3가 되어주는 이 기기 없이 여행이 가능하다고?     


사실 내가 대학생 때만 해도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외국 여행을 할 때 휴대폰을 이용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럼 여행을 어떻게 했냐고?     

< 이제는 낡아버린 런던 튜브 맵 _ from 2008 >

여행지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지도를 받는 것이었다.  (이 습관은 지금도 남아서 여행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는다) 인포메이션 센터에는 무수히 많은 리플렛들이 존재하는데 일단 마음에 드는 리플렛은 몽땅 가방으로 밀어 넣었다. 천성이 게으른 여행자인 나에게 여행 전에 무언가를 조사해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포메이션 센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내 여행의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지도 한 장을 받아들고, 가방에 빵빵하게 리플렛을 채우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리고 인포메이션 센터 직원에게 대중교통 이용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숙소로 가는 길까지 물어보면 만사 Okay!     


숙소로 가는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냐고? 가까이 보이는 공중전화를 찾아서 동전 몇 개를 넣고 전화를 해 숙소 주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끝! (대학생 시절 주로 한인 민박을 이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면 친절한 숙소 주인아주머니, 아저씨가 그 지역의 명소와 그곳까지 가는 길, 할인 티켓 이용법, 맛집 등등 여행에 대한 꿀팁을 소개해 주실 테니 스마트폰 없이도 여행이 충분히 가능했다.    


< 그 때 그 시절 아날로그 여행의 산물 _ from 2008 >

지도를 보고 이동하니 하루면 그 도시의 지리에 빠삭해질 수 있었고, 휴대폰을 볼 일이 없으니 길거리 신호등의 모양에, 나를 스쳐 가는 자동차들의 색감에, 막다른 골목 끝에 위치한 그라피티에,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는 사람들의 표정에, 그 도시의 숨결 하나하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의 웃음소리, 거리의 음악가들의 버스킹 연주, 자전거의 따르릉거리는 소리도 모두 음악이 되니 따로 MP3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게 여행을 하다 길을 잃은 적도 많다. 하지만 모든 길은 이어지는 법이기에,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기에, 효율성 따윈 중요하지 않은 게으른 자의 여행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은 애초에 틀린 명제였다. 다만 조금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길과 시간이 좀 더 걸리지만 돌고, 돌고, 돌아 여유롭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길이 존재할 뿐이었다. 후자를 택할 경우, 그 도시의 민낯을 마주할 뜻밖의 우연을, 관광안내책자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내 기준에 아주 멋진 곳에 닿는 행운을 만날 수 있었다.     

 

< 그 도시의 숨결 _ Madrid, Austuria, Barcelona _ 2008 >

물론 스마트 폰이 여행을 더 쉽게,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구글 맵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어떤 경로가 더 빠른지 계산할 필요 없이 지도 한 장을 손에 쥔 채로 낯선 도시를 누비던,  맛집을 찾으려 블로그를 검색하는 데 시간을 쏟지 않고도 우연히 닿은 골목의 오래된 음식점에서 아무거나 먹어도 행복했던 그 날의 아날로그 여행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누군가 말했다.      


“Life was much better when blackberry and apple were just fruits.”         


여기에 감히 한 마디 덧붙이려 한다.      


“Not only life, travel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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