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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히 Sep 06. 2018

6. 시간의 거름망에 걸러진 것들

독일 로맨틱가도 여행 : 딩켈스뷜 


늘 시작 전에는 의욕이 넘쳐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낙관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상상하기를, 여행지에서는 내가 보낸 오늘을 매일 밤 생생하고 꾸준하게 기록하려 했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막상 실제로 닥치니 내 낙관은 내가 간과했던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무참히 패했다. 그날그날 바로 기록하는 건 게으름 많고 일기마저도 잘 쓰고 싶은 내게는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었다. 내 성급한 낙관에 배신당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는 아쉽지도 않다. 

결국 매일 쓰는 기록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밀린 기록들을 이렇게 천천히 뽑아내는 중이다. 한참을 주무르고 기다려 숙성한 반죽으로 고운 면을 뽑아내듯이 말이다. 

비록 생생함은 덜해도 천천히 쓰는 기록의 장점이 있다. 그 당시에는 다 새롭고 다 중해 보이던 것들을 시간의 거름망으로 건져 올리면, 내게 진짜 소중했던 것들만 남는다. 내게 시간의 거름망은 꽤 요긴하다. 다 기록하고 싶은 욕심에 힘이 빠지고 정말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내 게으름에 대한 성공적인 합리화 방안을 찾았다.   

독일 로맨틱 가도 도시 중 ‘딩켈스뷜(
Dinkelsbuhl)’도 시간의 거름망에 천천히 걸러졌다. 가장 깊게 남아 있는 곳은 딩켈스뷜의 공원이다.





이 공원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예뻤다. 초록 나무들과 색색의 꽃, 고요히 흐르는 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오리들이 어우러져 꼭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 풍경들에 반해 처음에는 사진 찍기 바빴다. 작고 오래된 느낌이 비슷한 몇 개의 도시에서 연달아 머물다 보니 엇비슷한 도시의 풍경에 감흥이 사라져 버릴 즈음이었는데, 이 공원이 신선한 예쁨으로 다가왔다.  


이건 분명 라푼젤 머리카락. 이런 센스 사랑해


하지만 시간이 제법 지난 뒤에도 이 공원에서 마주한 장면들이 내게 깊게 박힌 이유는 단지 풍경이 예뻐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훔쳐본 사람들 때문이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지, 공원에는 관광객보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누군가의 일상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평범한 시간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해 질 녘 즈음 같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를 향하는 두 소년을 보았다.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나란히 나아가는 그 친구들의 뒷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멀뚱히 보았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 다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겠지 상상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등하교를 자전거로 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동생과, 때로는 친구와 좁은 시골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장면이 이 두 소년을 보며 떠올랐다. 그때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시간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 어서 집에 닿았으면 싶은 무미건조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장면이 참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의 온도, 색, 표정, 냄새 등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예쁘게 미화되어 남아있다. 내 인생만큼은 마음대로 미화하고 산다.  

저 소년들도 어른이 되어서 그들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기억할까. 공원을 통과하는 가로수길을 따라 둘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때 참 좋았다고 생각할까. 

그때는 모르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순간들도 지금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남을 것 같았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닿으니 한 호흡 한 호흡마저 소중히 다가와 옆에 있는 예성의 손을 괜히 더 꽉 잡았다. 이 모든 건 금세 또 까먹겠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벤치에 앉아 쉬다가 한 노부부 한 노견을 만났다. 그들은 한 가족이었다. 부부는 천천히 걸었고 늙은 개는 그 뒤를 더 천천히 따라 걸었다. 개는 힘든지 숨을 헐떡이며 잰걸음으로 부부 뒤를 쫓았다. 부부와 개 사이의 거리가 제법 벌어졌다.

뒷짐을 진채 사근사근 대화를 나누며 공원을 걷던 부부는 중간중간 멈추고 바지런히 걷고 있는 개를 기다려주었다. 재촉하는 잔소리 하나 없이, 어디쯤 오고 있나 확인만 하며.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거리, 기다리기 위한 멈춤, 다그침 없는 눈빛.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 그 느릿한 광경에서 ‘가족’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에도 공원을 찾았다. 출근 시간 이후였기 때문인지 공원의 아침에는 사람보다 오리가 많았다. 오리들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도 경계하지 않았다. 한 번도 사람의 공격받아본 적 없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리들의 낮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심히 물가 벤치에 앉았다.



우리도 오리를 따라 여유로움을 만끽하려 했건만, 항공사 직원과 통화로 짐 분실 문제를 실랑이하느라 기분이 다 망가져 버렸다. 고요한 공원에서 내 항의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게 민망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행히 사람은 없고, 오리들은 동요하지 않은 채 모른 척 낮잠을 이어갔다. 분실된 짐은 점점 되찾을 수 없는 짐이 되어가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을 느끼며 무척 답답하고 억울했다. 평화로운 공원 풍경과 반대로 우리 마음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낭패감에 젖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고요한 공원 풍경을 바라봐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불편하던 중에 할머니 한 분이 보행 보조기를 끌고 우리가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오셨다. 물가에 선 할머니는 천천히 보조기 안에서 의문의 봉지를 꺼내셨다. 할머니 주위로 오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익숙한 움직임에서 매일의 중요 일과를 시작하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그 비닐봉지에서 빵 부스러기들을 꺼내 오리들에게 뿌렸다. 낮잠에 취해 미동도 앉던 오리들이 신이 나서 빵 부스러기들을 받아먹었다. 할머니는 그런 오리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셨다.

할머니의 조심스러운 움직임과 오리들의 흥겨운 호들갑이 서로 대조되면서도 잘 어울렸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분했던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하루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루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할머니는 손수 빵 조각들을 준비했고, 불편한 걸음을 끌고 물가로 나와 출출한 오리들에게 간식을 주셨다. 할머니의 그 노력이 되게 멋있었다. 

내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거창할 필요가 없구나, 그게 무엇이든 남들이 뭐라 하든 내게 소중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 하루는 충분히 귀중하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잃어버린 짐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값진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우린 오늘 하루를 우리의 의미로 채우고 살자며 뒤집혔던 마음을 추스르고 그 공원을 나왔다. 한결 가벼워져서 다음 도시를 향하는 버스를 탔다.

시간의 거름망을 거쳐 남은 것들이 참 별거 아니면서도 별거 이다. 그게 또 여행의 묘미인듯하다.




시간의 거름망 사이를 빠져나갔지만, 사진만이라도 남겨두고 싶은 여전한 욕심으로 기록을 해둔다. 



우리가 반한 서점



예성이 찍은 나, 내가 찍은 꽃



딩켈스뷜에서 호랑이 장가간 날, 소나기를 피해 지붕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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