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찾아가는 둘만의 답
<거기까지 가서 그렇게까지>가 2022년 1월 1일에 나왔다. 2022년 6월 끝 무렵, 이제 올해의 반이 지나간 시점에서 오랜만에 우리 책을 다시 펼쳐봤다. 거기에 내가 ‘전우애, 그 뜨거운 격정의 사랑’이라는 챕터를 썼더랬다. 그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좀 숨고 싶어졌다. 쓴 대로 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어쩜 이런 말을 다 했더라.
“신혼 때보다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부부는‘전우애'로 산다는 말도 너무 많이 들은 클리셰인데, 이제 그 말이 서로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격정의 말이란 걸 알았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가장 은밀한 내면까지 튀어나오는 치열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은밀한 바닥을 품어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거기까지 가서 그렇게까지>
이 책 원고를 쓸 당시, 남편과 온갖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식의 결론을 맘 편히 내리고 있었다. 이 자신만만한 모습이 한 치 앞도 모르는 치기 어린 시절처럼 보여 좀 부끄러웠다. 부부 사이의 흔한 고민을 주변에서 수없이 보고 들으면서도,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한 그간의 자신만만함이 오만하게 느껴진 거다. 거기서 몇 발짝 더 가본 지금은 저렇게 자신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단절감의 한기가 우리 부부를 서서히 덮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우리의 온도가 미지근하게 식기 시작했다. 까놓고 보니,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조금씩 메말라갔달까. 문제를 문제로 인식한 건 그날의 데이트였다. 남편과 파스타가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을 때, 남편 회사 점심시간에 맞추어 가진 1시간짜리 짧은 데이트였다. 이런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몇 달 만이었다.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보는데, 순간 너무 낯설어 나도 모르게 눈을 자꾸 피했다. 아이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새로운 대화 주제를 찾는 중에도 턱턱 막혔다. 남편과 4년을 연애하고, 결혼한 지 6년이 지났는데 이런 어색함은 처음이었다. 뜨겁게 싸우던 순간보다도 이 낯선 어색함을 느낀 순간이 우리 사이에 찾아온 위기처럼 느껴져 덜컥 겁이 났다.
우리에게는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었다. 다른 수많은 인간관계는 어렵고 복잡해도, 남편과의 관계만큼은 노력하지 않아도 착착 맞는 순간이 많았기에. 우린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가장 친밀한 존재였었다.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를 보면 우리도 당연히 변함없는 사랑을 지켜갈 거라고 확신했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서로가 어색해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있다니.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정으로 산다.", 뭐 이런 부류의 말들이 조금씩 공감이 되려고 했다. 끝까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던 우리도 결국 이렇게 바닥난 친밀감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살게 되는 건가 싶었다. 꿈에서 깼을 때의 멍한 충격이 있었다. 동시에 붕 떠 있던 발이 땅에 닿은 듯한 생생함도 있었고.
이런 부부간 고민이 우리만 하는 고민이 아닌 만큼, 그 원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편과 대화하는 시간이 거의 없는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일과 육아로 바빴고, 밤이 와도 난 여전히 밀린 작업을 하고, 남편은 아이와 먼저 잠들거나, 혼자 영어 공부를 했다. 작년 1년도 이미 그렇게 살아서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단절감의 게이지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나 보다. 사라지는 대화와 함께 스킨십도 불편해졌다. 내겐 누굴 만지고 만져질 에너지와 시간이 없었다. 남편의 가벼운 스킨십에도 왠지 그 이상의 낌새가 있는 것 같으면 돌연 자는 척하는 데에 선수가 되었다. 요즘은 밤마다 아빠를 찾는 아이(아주 기특한 아이) 때문에 남편이 아이와 같이 자고 나만 커다란 침대에서 혼자 자고 있다. 부부가 같이 잠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단절감에 부채질한 것 같기도 하다.
며칠 뒤, 남편과 잠시 카페에 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나름의 노력을 한 거였다. 아이를 유모차에 재운 채로 얼마 전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이어 나갔다. 일단은 솔직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 괜찮은 척하기에는 우리 사이에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느꼈으니까.
그때 처음으로 “너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멀어진 것 같아. 그래서인지 마음뿐 아니라 몸이 닿는 것도 어색하고 불편해.”라고 말해 버렸다. 무수한 딴청으로 상황을 넘겨오면서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이었던지라 쉽지 않았다. 그런 내게 남편도 조심히 물었다. “더 이상 나를 남자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 말을 듣고 왈칵 울고 말았다. 남편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사랑받고 있다고만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울어버리는 날 보면서 새삼 다시 알았다. 내가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그날, 우리가 공유하는 친밀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확인했다. 친밀감이라는 게 연애와 신혼 시절에는 거저 주어지는 산소 같은 거였는데 말이다. 이제는 그냥 저절로 되는 시절은 끝난 것 같다. 우리는 어떤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 바닥난 친밀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인가, 그냥 이대로 살 것인가. 대화 끝에 우리는 친밀감을 회복하는 노력을 기꺼이 하기로 했다.
결혼 청첩장에 이런 문구를 썼었다
“더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결혼이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결혼입니다.”
뭣도 모를 때 말은 번지르하게 잘했다. 이 문구를 쓸 때에는 이 말의 진짜 무게를 잘 몰랐다. 하지만 진심을 담은 말이긴 했다. 이제는 이 말을 내 삶에서 생생히 실현할 때가 온 거다. 더 사랑하기 위한 노력.
일단 매일 밤 함께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정했다. 시간은 11시 반이다. 대화 주제는 “오늘 하루의 감사 세 가지”. 그렇게 감사한 것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한 다음에는 각자의 시간을 편안히 보내기로 했다. 주말에는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 추억이 될만한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권태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은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남편과 둘만의 여행을 1박 2일로라도 갖기로 했다. 이 결심을 하고 올해에는 3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단둘이 대구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각자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는 시간도 갖기로 했다. 각 개인의 상태가 좋아야 부부로 함께하는 시간도 좋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남편은 매주 한 번 축구를 가고, 나도 매주 한 번은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새로운 장소에 기차를 타고라도 가기로 했다. 상대의 즐거움을 응원하며 혼자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감수하기로 한 거다. 단골 갈등 소재가 되는 ‘가사노동’도 우리에게 맞는 역할 분담을 여전히 찾아가고 있다. 둘이 떨어져서 자는 건 같이 자는 쪽으로 노력하고 싶지만, 아직 아이가 새벽마다 깨니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이와 함께 모두 함께 자는 쪽으로 해야할 것 같다. 스킨십 문제는 서로 노력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여전히 노력할 자신은 없지만(껄껄). 이 모든 게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거지 잘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남편과 약속한 대화 시간인 밤 11시 반을 넘겨서 글을 쓰고 있고, 남편은 아이와 함께 잠든 거 같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중에도 모든 시도와 실패들이 사랑하려는 노력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남편이 그걸 같이 하려고 해?"였다. 막상 그런 질문을 들으니 내가 남편을 억지로 끌고 가고 있는 건가 싶어 아차 싶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는 노력이 너도 정말 원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답했다. 본인이 정말 원한다고. 자신은 관계 중심적인 사람이라, 망가진 관계가 있다면 반드시 바로잡고 싶다고. 그게 아내와의 관계인만큼 더욱 애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부분이 서로 잘 맞아 다행이다
이런 노력을 하면서 느낀 것은, 예전이라면 이만큼 노력하면 다 무너졌을 남편과의 벽이 생각보다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몇 년 동안 천천히, 견고히 쌓인 벽이라 그럴까. 그래도 이 벽돌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조금씩은 가까워지고 있다고는 느낀다.
친밀감을 회복하기 위해 일단은 노력하기로 했다는 우리의 이야기를 어느 부부에게 전했을 때, 그 부부는 더 이상 그런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각자의 성향과 방향을 억지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우리에게는 답이 될 수 있는 것이 다른 부부에게는 답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반대로 다른 부부에게 답인 것이 우리에게는 답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쨌든 어떤 노력을 하는 것도, 어떤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결국 다 '함께하려는 사랑'이라고 느꼈다.
모든 부부는 함께하는 길 위에서 둘만의 답을 찾고 있었다. 그 답에는 각자의 이유와 서사가 촘촘히 배어있어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특히 부부의 일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각자 다른 상황과 그에 따른 다른 답이 있을 뿐인데 그런 주제에 대해 굳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쓴 이유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사랑의 결심을 나누며 힘을 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