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의식하고 싶은 시선과 이제는 사랑하고 싶은 시선

미움받을 용기_고가 후미타케&기시미 이치로

by 다정

좀 찌질한 심보가 있다. 남들 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뭣도 모르면서 괜한 반감을 갖는다. 그런데 남들 다 하는 건 그냥 막 해보고 싶은 맘도 있다.

이 두 상반된 마음은 서로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내 안에서 잦은 충돌을 빚는데, 읽고 싶은 책을 고를 때 특히 속 시끄럽게 군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도 그랬다. 이 책은 한창 장안의 화제가 되어 내 뉴스피드를 종종 채웠었고, 뭐길래 다들 저렇게 읽을까 싶어 궁금했다. 그래도 서점 베스트셀러 칸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이 책을 내 돈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제목도 한몫했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이 쓰여있는 책을 들고 있으면 괜히 '나는 미움받는 것을 무지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만인에게 공표하는 것 같았다. 사실 되게 그런 사람이라서. 그게 찔려서.

하지만 돌아 돌아 결국, 첫 책 리뷰를 '미움받을 용기'로 하고 있다(여전히 사지는 않았고 빌려서 읽었다). 내게 엄청나게 좋은 책이라서가 아니다.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 지점들도 있었다. 다만,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만남이었음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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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일본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관점을 통해 설명하는 책이니, 이 책과의 만남은 아들러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학부 때 상담심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알프레드 아들러'는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외웠던 이름이다. 그와 연관된 '개인심리학' 같은 단어들도 기억한다. 시험도 꽤 잘 봤다. 문제는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열심히 외우면서도 진짜로 이해한 적이 없어서다. 이럴 때면 그 시절의 내가 참 아쉽다.

어쨌든 이름만 익숙한 아들러가 했던 한 마디를 이 책을 통해 만났다. 일종의 통쾌함을 느낀 문장이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 상태를 묘사하는 문장이었다.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나름대로의 귀농생활을 하면서 내 일생 동안 가장 스트레스 없이 살고 있는 요즘이다. 그 이유 중 핵심은 내 주변에 나를 아는 '타인'이 없기 때문이었다. '외롭지 않냐?'라는 지인들의 우려 섞인 질문에도 괜찮은 척하지 않은 채 '괜찮아요.'라고 답할 수 있었던 이유도 '타인'이 없는 삶에서 오는 엄청난 자유함 덕분이었다.


목사의 딸이라서 감당해야 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당연한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지겹게 힘들었던 릴레이 왕따 놀이에서 미움받을 차례를 피하기 위해 친구들의 시선에 늘 예민하게 대처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며 늘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에 나만의 공간과 시간 없이 24시간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었다. 취직을 하고서는 모두가 그렇듯, 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중심 동력으로 삼고 산 세월이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랬던 내가 나에 대해 뭐라 생각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는 낯선 곳에 왔다. (내 옆에 사람이 딱 한 명이 있지만 세상 제일 드럽고 찌질한 내 모습도 아직은 예뻐해 주는 남편이다. 은혜로운 존재다.) 그 해방감은 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다.

행복해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사람들과 어울릴 자신이 없었다. 출근하는 삶도 상상하기 싫었다. 그냥 지금 이 상태가 너무 달콤했다. 학교를 꾀병으로 결석한 날의 달콤함과 비슷하다. 그런 내게 이 책에서는 '직면하라'라고 이야기한다.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
개인이 사회적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과제


결국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소속된 공동체에 존재로서 공헌할 때 개인이 삶의 의미를 느낀다는 것이 아들러의 주장이다. 그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마주해야 할 '일, 교우, 사랑', 즉 타인과의 관계와 연결된 과제를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되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위 과제들을 받아들이면 된다는데, 말이 쉽지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는 경계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타인의 과제이지 내 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신경 쓸 바가 아니라는데, 우선 유명하고 똑똑한 인생 선배가 그렇다고 하니 속 시원해지는 지점은 있었다. 다만, 삶 속에서 진짜 저 경계선을 그어보려고 하니 저 문구를 주문처럼 외워도 원래의 나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미움받을 용기'는 아니어도, '달라지고 싶은 용기'를 얻었다.

'어떻게' 부분은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이랑 쇼부를 봐야 할 일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이 큰 동력이 되는 사람이고, 그게 무진장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 내 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의 시선이었던 긴 시간은 끊고 싶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을 평생 의식하는 삶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나를 움직이는 건전지를 천천히 바꿔 주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렇게 조금씩 타인을 '의식'하기 보다 타인을 '사랑'하는 내가 될 수 있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