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꽤 열심히 다닌 편이다. 특히 대학생일 때,학기 중에는 일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다가 방학이 되면 베짱이로 변해 열심히 놀러 다녔다. 그 당시의 나는 여행을 가면 많은 것을 보는 게, 남들 다 본다는 걸 보는 게 중요했다.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을 꼭 봐야 했고 유명하다는 젤라또 가게에 들려 쌀맛 젤라또를 꼭 먹어봐야 했다. 이렇게 꼭 해야 하는 것들이 계획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을 다니다가 문득 '어딜 가든 똑같이 사람 사는 동네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유명한 관광지 근처에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마트도 있고 공원도 시장도 있었다. 언어만 달랐지 우리 동네에 있는 것들이 다 있었다. 이걸 깨달은 이후로 계획에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빈틈 투성이 여행이 되었지만 오히려 기억 남는 것은 더 많아졌다.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고 재미있었다. 빽빽한계획 속에서 어딜 가든조급했던 마음은 점차 사라졌고 가벼운 결심으로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아, 이 음식은 꼭 먹어야겠다.' 정도의 계획만 세우기도 한다. 먹는 것에 진심이다 보니 보통 이런 식으로 음식 위주의 코스가 짜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창원으로 경주로 제주도로 혼자 무작정 떠날 수 있었다.
이런 여행을 즐기는 나만의 노하우도 생겼다. 먼저,작고 사소한 것이더라도 지나치지 않고 보고 느끼려고 노력해야 한다. 숙소 주변은 지도를 보지 않고 걸어보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에도 눈길을 두어본다. 그렇게 걷다가 공원을 만나면 잠시 쉬어가면서 주말을 맞은 이곳 주민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본다. 이렇게 곳곳을 눈여겨보면 빈 공간이 다채롭게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아쉬움에는 관대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못 본 것, 지나친 순간, 못 먹은 음식에 대해 아쉬운 감정이 생기면 그걸 핑계 삼아 또 오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 여행이 마지막이 아니기에 이번에는 오롯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보고 느끼고 먹으면서 즐길 수 있다. 그런 순간들이 모이면 낯선 여행지에서 사람 사는 동네가 되었다가 우리 동네가 된다.
코로나 19 이후에는 가벼운 결심만으로 떠나기 어려워졌다. 답답하기도 막막하기도 했지만 그럴 땐 우리 동네를 여행하면 된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에는 늘 똑같은 등하굣길을 걸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기숙사에서 지냈으며 대학생활은 타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아직 내가 사는 동네도 잘 모르는 게 사실이다. 다 커서 이제야 동네를 탐방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지만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가까운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좋게 느껴진다.
잠깐의 외출이 아니라 하루치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던 골목길도 예뻐 보이고 못 봤던 것도 보이게 된다. 우리 동네 맛집, 우리 동네 책방, 우리 동네 아지트...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재미있다. 지금 나는 낯선 길을 탐방 중이다. 방향감각을 세우고 어느 방향으로 가면 무엇이 나오는지부터 찾아본다. 휴대폰만 켜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 길을 잃기 어려운 요즘이지만 길을 잃어도 보고 또 찾아도 본다. 우리 동네를 당당하게 지도 없이 돌아다닐 날을 기대하면서 조금 헤매더라도 차근차근 동네를 알아가는 게 새로운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