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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Jan 11. 2020

운명(運命)

운명(運命)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체념 상태에 머물러야 할 때, 사람들은 이를 피할 수 없으며 인간을 초월하는 힘에 의해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길흉화복인 운명이라 여긴다.

어제저녁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문을 갔다가 집으로 가는 중이라며, 엄마 아빠는 잘 있는지 안부를 물어 왔다.

동기생이 죽었다는 말에, “누구?” 하고 물었더니,

“군함을 타던 군대 동기”라는 아들의 말.

“괴롭힘을 당했구나” 라며 묻지도 않고 짐작해하는 내 말에,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으면 자살했을까?, 다 볼 수 있어도 자식 잃은 부모는 못 보겠더라”며, “엄마 아빠는 잘 있지? 키워줘서 고마워”라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래 내 아들 마음이 힘들겠구나. 엄마 아빠 걱정해줘서 고맙다. 너도 항상 천천히 조심해서 운전하고 안전하게 잘 지내라”며, 통화를 끝냈다.

전화를 끊고, 멍한 상태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죽음!

아직 어리기만 한 어린 내 아들이 함께 힘든 훈련을 받던, 그러나 그리 친하게 지낼 기회는 없었던 동기생의 죽음과 슬퍼하는 부모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내가 더 친하게 지냈었으면 좋았을걸”하는 아들 말에는 죽은 동기생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묻어있었다.

집으로 가면서 많은 생각과 힘든 마음을 아빠인 내게 전화로 전해 왔다.

많이 힘들었겠지... 내 아들이?....

나와의 통화로 울적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을까?

전화를 끊고 나서야 드는 생각, ‘내가 아픈 아들 마음을 충분히 잘 어루만져 주었나? 더 많이 더 따뜻하게 공감해 주었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더구나 나이 든 태를 내려고 작정한 듯, ‘천천히 운전하고 조심하라’는 꼰대질까지 했으니....

나는 아직 멀었다. 공감을 잘해야 하는 상담가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엄마 아빠 죽으면 어떻게 해? 엄마 아빠 없이 나 혼자 어떻게 살아?" 눈물 글썽이며 울먹였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죽음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되돌이 킬 수 없으며 다시 만날 수 없는, 더구나 함께 보듬고 살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그때 나와 아내는 “엄마, 아빠는 안 죽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며 말도 안 되는 위로를 하며 안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죽지 않는다는 말에는 ‘네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까지는 안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겼지만, 어디 죽음이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던가?

더구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란 게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내 나이 만 59세 되던 해,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때, 나는 얼마나 황망하고, 슬펐던가?

내 경험에 의하면 적어도 59세까지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그 죽음이 나든 아니면 타인의 죽음이든...

그 뒤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부모님 돌아가심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나로 확연히 구분될 수 있을 만큼, 삶에 대한 내 태도는 변해 있다.

아니,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뀌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뒤따라 바뀌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삶.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빠바바 빰...’ 하며 장엄하게 시작해서 누구나 아는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사람이 산다는 게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목적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터.

영문 모르고 태어나서, 나중에서야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을 잡고 사는 삶.

그러나 ‘삶, 그것 별 것 아니야, 너무 애면글면 살았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라는 늙은이의 말을 마음 한 귀퉁이에 붙잡아 매어 두고 살아가는 나.

‘응애~’ 하고 울며 태어난 나의 삶이 장중하게 시작했을 리는 없으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시작은 잘 못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장중함 속에서 별의 탄생과 소멸처럼, 작은 지구 위에 더 작고 작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어갈 생명, 그 자체가 신비롭고 경이롭기에 우주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베토벤은 위대한 음악가다.

운명은 한자로 ‘옮길 운運, 목숨 명命’으로 쓴다.

목숨을 옮긴다...

이는 목숨을 이어 간다는 뜻이다.

인간의 유한한 목숨이 후대에 계속 옮겨지며 이어진다는 의미다.

사전에서 말하는 ‘운명’의 뜻,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이라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능동적이면서도 적극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옮기는 게 아니라, 내 목숨과 같은 목숨을 복제 해 자녀에게 옮긴다는 뜻이니, 이는 아들딸 목숨은 곧 내 목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신의 죽음보다, 자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더 어려워하는지 모른다.

자녀의 죽음은 자신의 목숨이 미래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중단됨을 의미하기에...

배에서 내리기 전에는 어찌 피해 볼 수 없는 군함에서 며칠간이고 이어지는 괴롭힘을 당한 건장한 젊은이, 청년 장교가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부모가 물려준 운명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 갔다.

그 청년 장교가 전도양양할 삶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부모님보다 먼저 가기로 결정했을 때 얼마나 슬펐을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이 큰 슬픔일 거다.

고인이 된 청년 장교와 그의 가족에게 마음 깊은 슬픔과 위로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죽을 때 죽더라도 사는데 까지는 살아야지, 후회 없도록...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죽음 그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우리.

Well-dying이란 말은 웃기는 딴 나라 이야기다.

죽음에 어찌 ‘Well,  잘’이라는 접두사가 붙을 수 있겠는가?

잘 죽는 게 아니라, 잘 사는 게 중요하다.

태어남도 모르고, 죽음도 모르는 우리.

그러기에 우리는 알고 있는 현재 삶에 더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열심히 잘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니, 사랑하며, 그것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운명처럼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믿는 단 한 사람,

그리스 사람들이 믿는 세 여신 중 하나, 인간의 일생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라케시스(Lachesis)가 운명 속에 숨겼다가 내밀어 보여 준 사람, 라케시스가 어떻게 조정해 나갈지 모르겠으나, 아트로포스(Atropos)가 목숨의 실을 끊어 내어 목숨을 옮겨야 하는 날, 운명적으로 사랑했기에 후회는 없었노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9년의 끝이 저 만치서 사부작 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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