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Feb 10. 2024

2024 설날 관악산을 오르며...

설날 아침, 아내는 바빴다. 도시락 세 개, 과일을 깎고, 따뜻한 물과 커피를 준비했다. 새벽까지 논문 쓰다 잠든 아들과 감기로 밤새 기침하느라 충분히 못 잔 나, 정 씨 두 남자는 잠 깰까 조심스레 일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집을 출발해 대방역까지 걸었다. 길이 어제와 달리 한산해서 설날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큰집으로 가던 이야기를 아들에게 했다. 다른 형제는 모두 늦잠 자며 집에 있는데, 아버지를 따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던 것이 싫었고, 엄마가 해준 떡국을 먹고 싶은데 큰집 떡국을 먹는 게 싫었다고...

신림선을 타고 종점인 서울대 관악산 역에서 내려, 아들 학교를 방문했다. 행정실과 다른 조교들이 함께 쓰는 방을 구경했다. 아들 덕분에 서울대 조교방을 구경할 수 있어 아들이 고맙다. 조교로 일하며 박사 논문을 쓰는 아들은 설날이지만 학교에서 조용히 논문을 쓰겠단다. 아들이 타준 커피를 먹었다. 설날이라 교내식당이 열지 않았으므로 아들 몫의 과일과 도시락을 남기고, 아들 배웅을 받으며, 우리 부부는 학교를 가로질러 관악산으로 향했다.

학교와 경계에 있는 산으로 들어서서 대충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찾아 걸었다. 며칠 전 서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더니, 산길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산을 높이 오를수록 길은 점점 더 미끄러워지고, 눈이 쌓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등산에 나선 우리를 보며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틱도 없고, 아이젠도 신지 않은 맨몸으로 오르다가 미끄러질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관악산 연주대 정상을 앞두고 바위를 비켜 내려가야 하는 길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침 9시 30분부터 시작해, 12시까지 2시간 30분 올랐고, 몇 십 분만 더 가면 될 것 같은 길에서 돌아서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등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위험하는 걸 알기에 멈췄다. 인생도 승승장구 오를 때보다 퇴직이나 이직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평소 생각이 떠 올랐다. 살다 보면 가다가 중단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 사람들이 눈을 밟아 다져진 길은 미끄러웠으므로 가능하면 눈이 쌓인 곳을 찾아 걸었다. 똑바로 서서 걷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 크게 다치므로 허리를 구부리고 낮추어 걸었다. 세상 살면서 고개 쳐들고 빳빳이 살다 보면 더 많은 위험을 겪는다. 때론 수그리고 엎드려야 한다. 정말 미끄러운 바위틈이나 바위를 타고 내려와야 할 때는 네발이 아니라 다섯 발로 기었다. 다섯 발? 손과 발 그리고 엉덩이다. 엉덩이를 눈길 위에 대고 앉아 발을 펴고 손으로 밀거나 잡아당기면서 조금씩 이동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몇 미터를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했다.

몇 번이나 중도에 멈추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즈음 마당바위에 도착해 싸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바람이 불 때는 추웠지만 산과 도시를 내려다보며 먹는 점심은 정말 맛있었다. 아내의 수고 덕분에 설날 점심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어 고마웠다.

관악산이 초행길이라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 모른 체 가다 보니 사당역, 낙성대역 갈림길이 나왔다. 낙성대역 쪽으로 방향을 잡고, 때론 길이 아닌 숲 속으로, 때론 계곡을 타며 내려오다 보니, 서울대가 보였다. 겨울이라 숲이 우거지지 않아서 그나마 덜 헤맸으니 이 또한 고마웠다. 다시 도착한 서울대는 기숙사였다. 도로를 타고 걷다가 계단을 통해 학교를 가로질렀다. 미대를 지나 정문이 보이니 안심이 됐다. 이젠 지도를 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다.

관악산 서울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아픈 발을 잠시나마 쉬었다. 아들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는데 패딩 안에 입은 셔츠까지 땀에 젖었다. 감기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옷을 껴입은 탓이다. 땀이 흘러도 겉옷 벗을 엄두가 안 났다. 찬기운이 몸에 닿으면 예외 없이 기침이 났기 때문이다.

음력으로 1월 1일, 정초부터 운동을 제대로 했다. 미끄러운 길을 다치지 않고 내려올 수 있어 다행이다. 등산을 하며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내 건강을 확인했다. 나보다 등산을 더 잘하는 아내가 끌어준 덕분이다. 여러모로 고운 아내다. 2024 갑진년 건강하고 즐겁게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산행이었다. 바쁜 아들과는 함께 못했지만 아내와 추억을 쌓을 수 있어 행복한 하루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4년 설에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